세상은 생각보다 친절해.

by 이정연



투석이 끝나고 엄청 지친 몸으로 버스에 올랐던 어느 날, 노약자석에 털썩하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북적거리기 시작했고, 영감님 한 분이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내 옆에 서서 한참을 헛기침을 했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젊은것이 버스 앞의 노약자석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이 꼴 보기가 싫었던지, 나이 든 자신에게 자리를 내놓으라는 그런 복잡하고도 단순한 메시지가 담긴 헛기침을 영감님은 뱉어내고 있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겸연쩍은 듯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날은 달랐다.


투석이 힘들었던 그날, 인공신장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데 팔에 흐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아 왼팔 주삿바늘 자리를 막아둔 지혈 솜을 비집고 나온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혈이 안 되어 피가 흘러내린 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놀랐고, 소리 없이 줄줄 흘러내린 피에 급격히 몸이 더 지쳐버렸다.




나는 영감님의 헛기침이 주는 메시지를 듣지 않았다. 그대로 앉아 있는 나를 보던 영감님은 내가 괘씸했는지 나를 한참이나 쏘아보다가, 뒷좌석이 비자마자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내가 내리는 순간까지 내 등을,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좌석 등받이를 발로 찼다. 내가 앉은 작은 좌석 전체가 울렸다. 서러운 마음에 속이 울렁거렸다.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양보란 없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그럼에도 여전한 문제는, 내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얼마 전에도 버스의 노약자석에 앉아 있는데 내 옆에 서서 중년 부인과 할머니 두 분이서 나를 욕했다. '젊은것이 어른들 서 계신데 #@~%^..'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욕이 완전하게 들리지 않았고, 내 몸이 힘드니 그냥 무시했다.

여차하면 팔의 흉터를 까고, 내가 지금 이 버스 안에서 가장 병들었다고, 나랑 병으로 한 번 겨뤄볼 테냐고 소리를 지르면 그만이다. 실제로 그러진 못하겠지만, 안 아파 보여서 욕을 먹어야 하는 일이면 나를 위해 그 정도 각오는 되어있다.


투석이 끝나고 잠시 간호사 데스크의 의자에서 숨 고르기를 하는데, 보호자나 환자들이 내가 간호사인 줄 알고 무언가를 묻는다거나 의료기기 관련 회사 직원분이 나를 간호사로 착각하는 일도 흔하다.

기차를 타면, 아프다는 이유로 할인을 받아 좌석 예매를 한 내가 혹시 부정 승차한 것인가 관련 신분증 확인을 꼭 하곤 한다.




월요일 오후, 텅 빈 기차 안. 내가 탄 칸에는 승객이 단 두 사람이었고, 가장 후미의 객차여서 승무원들이 많이도 지나갔다. 그중 젊은 승무원이 오가다 나를 보고는 자세를 한껏 낮추고 말을 걸어왔다.

"고객님, 대전까지 가시는 거 맞으시고요."

"네."

그리고 나는 이어 말했다.

"신분증을 보여 드릴게요."

하고 가방을 뒤졌다.

"아, 아닙니다, 고객님! 혹시 하차 시에 도움이 필요하실까 하여 여쭙는 것입니다."

"아, 네. 제가 투석환자라 어디 다른 곳이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만."

"앗, 네 고객님. 실례가 많았습니다. 즐거운 여행되십시오."

하고 젊은 그는 겸연쩍은 마음이 묻어나지만 무척 환한 미소를 남기고 떠나갔다.


그가 실례가 많았다고 말한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아프지만 난 괜찮아, 아프지만 난 당신들에게 피해 주지 않아요. 늘 속으로 되뇌던 말이다.

세상은 날카로운 곳이라고 생각했고, 그 세상이 내게 어떤 못된 행동을 하든 나는 의연하게 그들을 받아 넘기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넌 아픈데도 참 멀쩡해 보인다, 건강해 보인다. 칭찬인 듯 아닌 듯 때로 나를 생채기 내는 그 말들 앞에, 나는 나의 아픈 부분을 감추려 부단히도 노력하며 살았다.

그런데 순수하게 내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 캐리어는 작지만 무겁다. 금괴를 싣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아마 그는 내가 열차에 오를 때, 낑낑대며 캐리어를 올려두고 내 몸을 싣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중하게 도움을 주려한 것인데, 그런 호의를 받아본 일이 없는 나는 그에게 딱딱하게 대답했다. 방어할 생각뿐이었다. 도와준다는 이야기였다면... 도와달라고 할 것을.

그 후, 혹시 다시 그분이 지나가는가 하고 몇 번이고 쳐다보았지만 그는 지나가지 않았다.

나는 금괴가 든 캐리어를 직접 내렸다.


이 일을 되새기며 떠올랐다. 그 언젠가의 기차 안에서도 어떤 젊은 여자 승무원이 내게 이러한 친절을 베풀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는 것.

물론 앞서 신분증 확인은 했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내게 도움이 필요할 만한 일이 있는지 물었다. 그저 가방 하나뿐인 단출한 여행이라 도움을 받을 일이 없어서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얘기했다.


의외로 기차에서 신분증 확인만 당한 것은 아니었던 거다. 그래, 세상은 생각보다 친절하다. 내가 친절한 세상을 믿지 않았을 뿐.

앞으로 조금 덜 방어적으로 살아간다면, 친절한 세상을 믿어본다면 어떨까.. 되려 상처 받을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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