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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앵두 먹기를 참고 있는가.

by 이정연


엄마가 늙었다. 갑작스럽게 노인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이상한 노인이. (요즘 엄마 나이는 노인 축에도 못 끼는데...)


엄마는 언제까지고 늙지 않을 줄 알았다. 언제까지고 중년의 어드매에 그대로 서 있을 것만 같던 엄마가, 언제까지고 나보다도 기억력이 좋을 줄 알았던 엄마가 이상해졌다.




엄마는 여느 엄마들처럼 방청소 해준답시고 나의 일기를 훔쳐보고는, 대뜸 열 살짜리의 시를 칭찬했다. 그 시절의 나는 '주말의 명화'를 꼭 챙겨보고 그 감동에 북받쳐 이상한 시 나부랭이를 쓰던 과몰입, 감정과잉의 어린이였다.

순간적으로 엄마에게 나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은 것만 같아서 기쁜 것도 잠시, 화가 났다. 남의 사생활을 침해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그걸 봤다고 저렇게 티를 내다니. 초등학에게도 나만이 가꾸고픈 비밀의 정원이 있는 법이라고!!


엄마는 참 극단적이었다. 무신경하면서도 섬세하고 아주 차갑지 또 지나치리만치 다정한, 이상하지만 예쁘고 똑똑한 아줌마였다. 어린 시절의 몇 년을 엄마 없이 자란 나는 늘 엄마가 미우면서도 엄마의 사랑에 목말랐다. 우리는... 참 간단하게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애증의 관계다.


그럼에도 엄마는 평생을 내게 져 주었다. 미친 듯이 싸우고 화해를 반복했다. 애증에서 지나친 애착을 거치고나서야 나는 엄마에게서 정서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사건들을 겪으며, 병든 몸을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이런저런 사건들에는, 엄마가 쓰러진 일이 모두 내 탓이라고 말한 이모들과 엄마 주변인들의 손가락질(사실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손가락질은 아주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사정없이 나를 베어버렸다.


어느 순간부턴가 나는 아픈 일도 모두 혼자 해결하고, 가족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서글픈 어른이 되어 있었다.

병든 내가 사람들에게 쓸모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단지 낮은 자존감 탓만이었을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한 결과, 엄마는 나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진 것이 지난가을부터. 엄마는 본래의 모습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내가 아픈 일에는 눈 감고, 귀 막고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아침 6시 반이면 투석하러 가야 하는 나를,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나를 새벽 3시 반마다 찾아와 깨웠다. 본인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울먹거리기도 했고, 안절부절못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잠결에 침대 발치에 선 엄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짜증을 내고, 야단도 친 끝에 새벽 3시 반에 찾아오는 버릇은 고쳐놓았다. 대신 밝을 때 시도 때도 없이 방문을 벌컥벌컥 열고, 온갖 일로 질문과 부탁을 해댔다.

짜증 내고, 야단치고, 또 좋게 말해 부탁을 해도 엄마는 내 방문을 연다. 결국 만만한 사람은 세상에 나뿐이고, 부탁할 사람도 세상에 나뿐이라서.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얼마나 많은 날을 불같이 화를 냈던가.

오늘은 티브이가 이상하다고, 새벽 5시에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그냥 일어나서 티브이를 다시 켜 주고 다.




이제 살림은 당연한 듯이 내 차지가 되어버렸다. 나는 시술을 받아 생살이 찢어진 상태로도(메스로 찢은 부위를 꿰매지 않았다. 혹시 고름이 나올 것을 대비해 의사 선생님은 찢긴 살을 그대로 열어 두었다.)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4번째 계절이 된 이제사 내게 주어진 살림의 숙명을 좀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듯하다.


모든 것이 엄마가 늙어가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여야 함을 안다. 이가 들면 사람이 갑자기 변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다. 그리고 아파서 이러는 거니까 이해해주어야 한다는 엄마의 주장도 맞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엄마를 '스트레스 최고조 상태에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 나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정하게 대해주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달라진 엄마가 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끔은 나를 고생시키는 엄마가 밉기도 하다.


심지어 어제는 엄마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지적하는 나의 말에, "너도 어릴 때 엄마 속 많이 썩였어."라고 하기에, "나는 보통의 자식들이 하는 짓을 했을 뿐이고요, 그렇다고 내가 진짜 심각한 사고를 친 적이 있나요. 그냥 청소년답게 승질부린 게 다지. 부모가 자식 때문에 속 썩는 거야 본인 선택에 따른 결과 아닙니까"라고 싹수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어쨌든 나의 잣스런 논리에 엄마는 졌다는 듯 실실 웃어버린다.


어휴... 이 글을 읽으실 모든 부모님들께 사죄드립니다. 제가 가평잣이 울고 갈 만큼 잣같은 인간 말종입니다. 흑흑.


물론 엄마의 지금 상태가 보통의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지, 하나하나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가볍게 하나만 말하자면, 뭔가를 쏟거나 흘려도 엄마는 닦지 않는다. 쿨하게 외면하고 자리를 뜬다. 그러면 그걸 나중에 발견한 내가 힘들여서 닦는 거다. 아니면 따라다니면서 닦거나. 처음에는 사춘기 딸 키우는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미운 일곱 살 키우는 심정이 되어 암담한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다.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그럼 엄마 심정을 알 거다!"

엄마의 저주가 그대로 이뤄졌다. 결혼도, 출산도 없이. 제기랄. 아오. 갑자기 지난날의 과오가 하나 둘 떠오르는 것도 같다!!!




오전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부장님께서 작고 빨간 앵두를 한 컵 따다 주셨다. 여름만 되면 부장님은 앵두를 종종 쥐어주신다. 회사 근처에 앵두나무가 있다는데, 사실 나는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 가끔 앵두를 따서 휘리릭 씻어서 한 움큼씩 가져다주시기도 하고, 한 컵 가득 따서 주시기도 하는데 나는 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입 안에서 새콤한 앵두를 굴려 아삭아삭 과육을 베어 먹고 씨만 남긴다. 귤도 달콤한 것보다는 새콤한 것을 더 좋아하는 내게 앵두는 최고의 간식이다. 일 년에 몇 번 만나지 못하는 귀한 간식.


그 앵두를 먹다 보니, 요즘 부쩍 먹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엄마가 떠올랐다. 우리 동네에서는 구하기 힘든 앵두를 엄마에게도 맛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콤해서 이가 시리다고 하려나? 앵두를 드시려나 메시지를 보냈더니, '아하지 새콤할수록 좋지'라고 답이 왔다.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지만, 참는다. 앵두 먹기를 그만두고, 앵두가 담긴 컵을 냉장고에 넣었다.

왜 나는 앵두 먹기를 참고 있는가. 아무리 엄마를 밉다고 흘겨보아도, 짜증을 내도 결국 사랑하고 있는 걸까. 아휴, 이 놈의 팔자. 앵두 딱 한알만 더 먹 엄마 갖다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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