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동생 준이는 지나치게 용감했다. 그 애는 온갖 위험한 행동은 다 하는 어린이였는데, 그중 나에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동네에서 가장 사나운 개의 꼬리를 잡고 빙빙 돌린 일이었다. 준이는 사나운 개를 만날 때마다 괴롭혔다. 얼마나 수많은 날을 개의 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괴롭혔던가!
결국 사나운 개는 준이의 지속적인 도발을 참지 못하고 그 애를 깨물었다. 누구든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다. 오히려 사납다고 정평이 나 있는 개치고는 아주 오래 참아준 셈이지.
준이는 개에게 물려서 그 길로 업혀서 병원에 실려갔다. 그 별난 준이가 울었다던가, 어쨌다던가. 어쨌든 준이 사건이 터졌을 때 나는 초등학생 어린이였고, 안 그래도 겁이 많은 터라 이후로 개만 보면 자연히 물리는 상상이 펼쳐졌다. 준이의 살신성인 덕분이었다.
그 시절 내가 만난 개들은 모두 어딘가의 마당에 묶여 있었다. 어느 회사의 마당이거나 어느 유료주차장의 입구이거나. 주인의 사유재산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가슴에 품고 있는그 개님들은 누군가 지나만 가도 사납게 짖곤 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는 가장 부잣집이라고 소문난 집이 두 군데 있었는데 하나는 세련된 현대식 양옥주택, 하나는 마당이 말도 못 하게 넓은 일본식 가옥이었다. 우리 집으로 가려면 대로변에서 들어가는 기다란 골목 쪽 입구와 일방통행길에서 들어가는 입구의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두 집은 각각 그 골목들의 초입에 있었다. 아무리 그 집들 대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어도, 그 부잣집 마당에 묶여있는 개들은 사납게 짖어댔다. 무서운 한 편, 어지간히도 지킬 것이 많은가 보다. 역시 부잣집은 부잣집인 듯. 어린 나는 속으로 그들의 부를 인정하며 조금 웃기도 했다.
그런 영향인지, 개는 마당에 묶어 키우는 것이 당연한 줄로 알았다. 부모님도 옛날 분이어서 개는 너른 마당이 있는 곳에서 묶어 키우고, 때로는 목줄을 풀어서 마당에서 마음껏 뛰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마당이 없던 우리는 개를 키우지 않았다. 물론 나는 개가 무서웠다.
큰집은 진돗개를 마당에서 길렀는데, 늘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반갑다고 겅중겅중 뛰며 꼬리를 흔들어대는 그 다리가 늘씬하고 키가 큰 진돗개가 나는 무서웠다. 그래서 큰집에 들어갈 때면, 큰아버지한테 "큰아빠~ 진돌이(진돗개다운 이름. 작명센스가 없는 것은 집안내력인 듯하다.) 안 풀리게 잡아주세요. 큰아빠가 진돌이 막고 서 있어 주세요."하고 큰아버지 뒤에 그림자처럼 딱 붙어서 현관으로 호다다닥 뛰어서 들어가곤 했다.
어른이 되면서느껴졌다. 강아지들이 나에게 호감을 가진다는 것을. 그러다 어느 잡지의 꼭지에서 읽은 것이, 강아지들은 덩치가 작은 사람에게 호감을 가진다는 것.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사람은 두려운 대상이고, 덩치가 작은 사람은 친구로 인식해서 호감을 가진다 했는데 마침 그때 가깝게 지내던 옆집 강아지인 포메라니안 몽실이는 정말로 키 크고 덩치가 큰 동생은 살짝 두려워하고, 나만 보면 그렇게 꼬리를 흔들고 손을 핥아댔다.몽실이와의 관계가 내게 있어 유일한 강아지와의 접촉이었다.
내 생애 그 이상으로 강아지와 끈끈하게 엮일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운명처럼 만난 그에게 자식처럼 생각하는 강아지 가족이 있다는 걸 안 순간, 알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그 어지러운 느낌을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자라면서 강아지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정도 극복했지만, 나는 여전히 강아지라는 존재가 낯설었다.그런데 그의 강아지 가족은 자꾸만 나와 그의 통화에 끼어들곤 했다. 나의 소중한 그는, 본디 좀 무뚝뚝한 사람인데 통화 중에 강아지 아가 '설이'(편의상의 가명)가 방문을 열고 나타나기만 하면 목소리가 대번에 변했다. 사실 연애 초기에는 그 아이를 조금 질투하기도 했다. 나는 골질을 내야만 이끌어낼 수 있는 저 우쭈쭈 하는 목소리를, 저 아이는 늘 끌어낼 수 있구나. 게다가 그의 인생에 최고 우선순위가 설이라고 하니 나는 늘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설이는 내 자식 같은 존재잖아. 그러니까 0순위지. 당신은 다른 의미로 엄청 소중하니까, 속상해하거나 서운해하지 마~"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자식(?) 사랑이 점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나도 좋아해 보자, 마음을 먹고 많이 노력했는데 그런 노력을 1년쯤 하다 보니 나는 어느새 진심으로 설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달이 바뀌면 늘 설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을 사서 보냈고, 처음에는 설이를 좋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그 일이 나중에는 가장 즐겁고 행복한 일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강아지들에 대해 찾아보고 공부하게 되었고, 이미 내 핸드폰 갤러리에는 설이 폴더가 따로 마련되어 매일 설이 사진이나 영상을 찾아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지금도 핸드폰 홈화면, 잠금화면, 화면보호기가 온통 설이 사진이다.)
그러던 어느 봄, 드디어 설이와 나는 첫 대면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정말 우습게도 둘 다 낯을 가리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처음 만나는 낯선 인간이 귀엽다고 마구 만지고 그러는 것은 강아지 친구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지식을 또 어디서 습득하여서 설이를 함부로 건들지 않았고, 설이도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조수석에 앉아있는 작은 정연이를 낯설어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썩 싫지는 않은 눈치여서, 설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컵에 담아서 내밀었더니 열심히 먹어주었다. 그리고는 자꾸 왔다 갔다 하며 나를 힐끔거리는 한편, 형의 품으로만 파고들었다. 그래도 내가 사진을 찍어도 말없이 있어주었고, 한 번은 턱을 잡고 잘생긴 옆모습을 찍어도 얌전히 있어주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내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었다. 나는 설이가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지금까지 주장하는데, 그는 착각이라며 항상 웃는다.
설이는 나와 만났을 때 이미 나이가 꽤 많았고, 심장병이 발병한 상태였다. 건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와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와의 통화 중에 설이는 자주 나타나 내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하던 간식을 제치고, 내가 보내준 간식을 더 좋아한다는 말에 자꾸만 우리 사이에 끈끈한 무언가를 느꼈고, 그가 실시간으로 보여준 영상 속에서 설이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언제나 내가 보내준 간식을 선택하곤 했다.
설이는 자꾸만 나의 우주에서 가장 특별하고 사랑스러운 유일한 강아지가 되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나에게 첫사랑이 찾아왔다는 것을. 어느새 나도 설이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늦게 만난 첫사랑 설이의 건강악화로 우리 모두에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 나는 친구를 만나러 간 부산에서, 설이가 태어났다는 부전동을 지날 때 설이를 생각했다. 설이가 건강해져서, 꼭 건강해져서 설이와 함께 이곳으로 여행올 수 있기를 빌었다.
설이는 많이 아픈 중에도 기운을 차려, 한 번은 영상통화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못생긴 얼굴을 하고서 설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고서 미소를 지으며 바보같이 손을 흔들었다. 설이는 기운이 없었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설이는 계속 위태위태했다.
어느 밤, 내 꿈에 설이가 나타났다. 나에게 "누나, 고마워."라고 말을 건네는 설이가 기운이 없고 추워 보여서 담요로 싸주었다. 그리고 설이를 업었다. 설이는 처음 만났을 때 10kg이 좀 넘는, 작지 않은 아이였다. 내 등에 업히기에 딱 알맞은 몸집이었다. 나는 꿈에 설이를 업고서, "우리, 형아한테 갈까?"하고 한참을 걸었다.
나는 꿈에 설이가 온 것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설이가 이제 나와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한 편으로 불안하기도 했는데 그 불안은 절대적으로 외면하고 싶었다.
설이가 꿈에 온 지 사흘이 지난 10월 16일 일요일, 설이 형아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그동안 설이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전 11시 설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회사에 있던 시간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마음껏 울 수 있었다. 설이에게 더 많은 걸 해주지 못한 생각에 속상한 밤들이 많았다. 그도 울고, 나도 울었다. 참 이상했다. 설이에게 나는 그저 친구일 뿐이었을 텐데, 설이는 그 후로도 자주 내 꿈에 나타났다. 설이가 누나가 잘해준 것, 예뻐해 준 것을 모두 알아서 그렇다고 그는 자주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자꾸 설이의 영혼이 내 곁에 머무른다는 느낌을 받았다. 설이가 꿈에 나온 날이면 우리는 설이 이야기를 하며 함께 웃고 울었다. 나의 꿈에 설이가 자꾸 나타나는 것은, 그에게 보내는 설이의 쪽지 같은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면서 설이는 더는 내 꿈애 오지 않았다.
아마 우리가 더는 슬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으리라. 그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른 세상에서 행복하게 뛰어놀고 있으리라.
나는 설이를 만나고, 진정으로 나와 다른 개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계산 없이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강아지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설이와 같은 존재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도 되었다.
언젠가 설이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곁에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또 설이를 운명처럼 사랑하게 될 테고, 그때 설이와 나는 더는 친구가 아닌 가족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