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연 Oct 04. 2023

365일 반팔을 입는 그 여자의 비밀


(012) 2023년 10월 4일 수요일


봄에 반팔을 입는다. 여름에 반팔을 입는다. 그거야 당연하지? 가을에 반팔을 입는다. 겨울에도 반팔을 입는다. 그렇게 사계절 365일, 나는 반팔을 입는다.


팔뚝에 15 게이지짜리 바늘 두 개를 아래위로 꽂아야 하기 때문에, 편의상 늘 반팔을 입는다. 병원 탈의실에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투석을 받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귀찮은 것이 딱 질색인 나는 늘 투석에 최적화된 복장을 갖추고 병원에 간다. 팔티셔츠에 편한 바지.

가을에는 반팔에 쟈켓을 입으면 되니까 크게 추위에 떨 일도, 특별할 것도 없다. 겨울에는 반팔을 입고, 그 위에 카디건 하나를 입고 나서 외투를 걸친다. 영하 15도는 기본값에, 가끔은 영하 18도, 20도로도 떨어지는 도시에 살다 보면 누구나 나보다 더 껴입을 테지만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겨울이어도 가끔 반팔 위에 외투만 딸랑 입기도 한다. 병원 탈의실 사물함에다 옷을 두 개나 벗어서 걸어두는 그 과정도 귀찮은 것이다. 물론 그런 날은 영하 15도보다는 훨씬 따뜻한 날이겠지.




추석 연휴를 며칠 앞둔 시점, 구독자인 B언니가 카톡으로 선물을 보내셨다. 이게 무슨 일이람? 하고 보았더니 반팔 티셔츠다. 반팔 티셔츠를 선물 받기는 또 처음이다. 파고니아 파파고니아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인데, 알파고처럼 똑똑해지고픈 열망을 담아 알파고니아를 선택했다. 예전에 이런 류의 티셔츠를 갖고 싶었던 적이 있다. 구찌임(아귀찜) 같은 티셔츠. 알파고니아라니, 정말 제대로 취향저격이다. 위트가 넘치잖아. 택배가 도착하자마자 세탁을 해서, 바로 다음 날 투석에 알파고니아를 입고 갔다.


참 신기한 것이, B언니 주변에는 콩팥을 잃은 사람이 많다. 그녀는 제일 친한 언니가 투석을 시작하게 되어, 언니를 이해하고 싶어 브런치에서 투석 대해 검색하다가 내 글을 찾아왔다. 벌써 그게 몇 년 전인가. 왠지 투석을 주제로 글을 쓰는 사람이 브런치에 있을 것만 같았단다. 그리고 홀연히 나의 댓글창에 나타났다. 20대 때 만났던 남자친구도 콩팥 기능을 잃어 이식을 받았었고, 지금 가장 친한 언니도 투석을 앞둔 시점이라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고맙고 신기했다.

아프고 나서 나를 떠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내가 골질을 한 것도 아닌데, 많은 이들은 희귀 난치병 자체를 두려워했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모습들이 눈에 뻔히 보였다. 자연스럽게 나를 떠나는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그녀는 생판 모르는 남의 글을 찾아보고라도, 언니를 이해하고자 했다. 힘이 되어주고자 했다. 그녀 같은 인연을 가진 그분이 부러운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 후로도 종종 아주 길고 긴 댓글을 남기곤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내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쓴 메일을 보냈다. 는 그 메일을 기쁘게 받아, 답을 드렸다. 나보다 한 살 위의 언니. 밝고 명랑한 사람. 우리는 강약 조절을 잘해가며 아주 천천히 가까워졌다. 아니, 건강한 사람이 왜 굳이 또 나처럼 아픈 사람과 친구가 되려 하지? 감능력이 뛰어나지만 살짝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그녀와 가까워지며 느낀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가 글을 써야 할 것처럼 그녀가 하고픈 말이 많다는 것. 대화할 때도 보통 위트가 넘치는 것이 아니라 넌지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언니가 대번 하는 말. "사실 나 그래서 브런치 작가에 도전했었어요. 떨어졌지만..." 그리고 난 그녀에게 다시 도전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하고픈 말이 정말 많은 사람이고, 그걸 충분히 글로 써낼 능력도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얘길 듣더니 그녀는 곧장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내게 글을 보여주었다. 나는 내가 작가신청 할 때를 떠올리며 그녀에게 도움이 될만한 아주 작은 이야기들을 해주었고, 그녀는 연거푸 몇 편의 글을 써내더니 두 번째 작가신청을 했다. 3일이 지나서였나, 당당히 브런치 작가되었다.


요즘 그녀는 신이나서 매일같이 글 발행을 한다. 브런치 작가가 된 지 일주일밖에 안된 사람이 브런치 북도 발행하고, 몇 백 킬로미터의 물리적 거리를 넘어 신이난 모습이 훤히 보인다. 그런 그녀 덕에 나도 신이 난다. 금요일에도 알파고니아 티셔츠를 입고 병원에 출근할테다.




어쩌면 난 투석을 견디기 위한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체 몸에 열이 많아서 원래 고향에서도 겨울에 반팔 티셔츠에 코트만 입고 다니던 십대였더랬다. 낮에는 그 코트를 벗고 반팔로만 다녀서 길가던 아주머니가 붙든 적도 있다. "야야, 니 괘얀나?" (미친애인 줄 아셨던 것 같다.)

머릿속에 사실은 미친 애가 하나 살고 있어서(진짜 미친애 맞다), 가끔 사람들이 상상도 못 할 단단함으로 추위 외에 다른 고통들도 견디며 살아간다. 그리고 희귀난치병 환자가 되어서, 투석환자가 되어 그걸 가지고 병팔이 글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좋은 사람들도 정말 많이 만났다. 사계절 반팔 티셔츠를 입으면서도, 살아볼 만한 인생. 귀여운 나의 인생.



매거진의 이전글 미워할 수 없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