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에 발병하고, 제정신이 아닐 때 친구 K는 간호사였던지라 내게 많은 조언을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 조언이라는 것이 내 형편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들이어서 많이 곤란했다.
"너의 병은 B시의 B병원이 좋으니 얼른 그리로 옮겨라. B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B시의 H대 병원에서 이식수술을 받아라."
친구가 말하는 B시는 서울에서 500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아는 사람 누구 없는 그곳에 갑자기 아픈 나를 데리고 가족들이 내려갈 수 있을 리가 없을 터였는데, K는 간호사인 자신이 옳다는 듯 조언 같은 강요를 해댔다.
이미 수도권에 자리를 잡고 산 지 몇 년인데. 게다가 갑자기 B시라니. 돈이라도 아주 많다면 B시에 집을 턱 하니 사서 옮겨갈 수도 있겠지. 그러나 우리 집이 이미 몇 번 망했던 것을 K는 모르지 않았다.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지 않을 조언만 잔뜩 늘어놓은 K와는 그렇게 연락이 뜸해지는 듯했다. 그런 우리 사이에 갑자기 연락이 활발해진 것은 그녀가 회사의 동료 의사에게서 소개팅을 받으면서였다.
물론 학생 때부터 나를 무척 좋아해 주었고, 내게 비밀이 없기도 했던 친구였다. 그러나 서로의 삶이 달라질수록 그녀의 조심성 없는 행동과 말이 내게 생채기를 내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동료 의사에게서 받은 소개팅답게 상대 남성은 조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K는 자랑을 줄줄 늘어놓았다. 나는 그 말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와 만난 지 50일 만에 확신이 생겼다,라고 하기에 더는 내가 알던 순수한 10대의 K는 없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26살의 K는 혼전임신으로 30대 후반의 조건이 무척 좋은 전문직 남성과 결혼을 했다. K가 좋아하는 B시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친구인 내가 반드시 와 주어야 한다며 '다정하게도' 내게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26살의 정연은 아직 투석 생활에 채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500km나 되는 먼 거리를 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조금 고민을 하다가... K에게 몸이 좋지 않아서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K가 서운해하리라는 예상은 했다. 그러나 적어도 걱정 한마디는 할 줄 알았고, 괜찮다는 이야기로 마무리가 될 줄 알았다. K는 무척 서운해했다.
등신 같은 이정연은 희귀 난치병 환자 겸 백수 주제에, 모바일 청첩장에 있던 K의 계좌로 축의금을 보냈다. K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K와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게 되었는데 또 모바일 초대장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K 딸아이의 돌잔치 초대장이었다. 역시 이번에도 B시였다. K 신혼집 근처인 듯했다. 이제 K에게는 넌덜머리가 났다. K에게 난 어떤 존재일까 싶은 회의감이 들었다. 10대에 그녀는 나를 무척 좋아했다. 사람들에게 나와 친한 것을 이야기하고 다닐 만큼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자신의 인생 이벤트의 들러리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미 그녀의 결혼식 때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사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내 번호를 알아도, 몇 년이 지나도 나의 안부를 묻지 않던 K는 5년 전이었나 연락이 닿았는데 당연히 내가 투석을 받다가 죽었을 줄 알았단다. K와는 우연이라도 만나고 싶지 않다.
진진은 서른 살 즈음에 결혼했다.
진진과는 고등학교1학년 때 같은 반에서 처음 만났다. 내 인생에 참으로 곡절이 많아서, 모든 사람들과 연락을 끊었던 때가 있었다. 일부러 끊은 것은 아니고, 전화를 없애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진진과는 악착같이 인연의 끈을 쥐고 있었다. 아마 본능적으로 진진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 때문인 것 같다.
앞서 말한 K와도 20대 초반의 언젠가 연락이 끊어졌다. 굳이 연락을 하지 않았던 대다수의 친구에 속했는데, K는 진진을 수없이 닦달했었다. 정연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많은 이들이 진진에게 나의 연락처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진진은 늘 그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진진에게는 나의 모든 고난을 다 보여주었다. 나의 모든 순간에 진진은 함께 했다. 그 시간을 모두 헤쳐오며, 생각했다. 진진이 결혼을 하면, 꼭 진진에게 양문형 냉장고를 사주어야지. 수도 없이 결심했다. 그러나 스물다섯에 희귀 난치병 환자가 될 줄 몰랐다. 제기랄. 정말이지 이런 계산은 없었단 말이지. 그렇게 진진이 서른 즈음에 결혼을 한다 하였고, 나는 여전히 백수 희귀 난치병 환자였다.
진진은 내게 등기우편을 보냈다. 정성스레 써 내려간 편지, 그리고 수표가 들어있었다.
결혼할 사람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와 창원이라는 곳에서 결혼식을 한다는 이야기, 청첩장이 들어 있었다.
'정연이가 와 주면 좋겠지만, 무리가 되면 오지 않아도 돼. 혹시 정연이가 올 때 차비에 보태라고 적은 돈이지만 보낸다.'
진진 때문에는 늘 감동해서 울곤 했지만, 그날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서른 즈음에는 진진에게 양문형 냉장고 정도는 사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내가 이것밖에 안되다니. 양문형 냉장고는커녕 축의금도 내 마음껏 할 수가 없겠구나 싶어서 서러웠다. 나를 결혼식에 초대하며 청첩장과 손 편지, 여비를 보내준 진진의 마음씀이 너무도 고마워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창원까지 가는 KTX 열차 예매를 했다. 그리고 아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컨디션 관리를 했다. 서럽게 우는 나에게 축의금 하라고, 엄마가 봉투도 꽤 두둑이 챙겨주었다.
20xx 년 5월 9일 토요일 서울역에서 홀로 창원행 KTX에 올랐다. 아프고 나서 친구의 결혼식에는 처음 가보는 터라 옷차림이 엉망이었지만, 마음만은 단정했다. 그날 가장 아끼는 카디건을 입고 갔는데, 결혼식이 열리는 창원의 집 마당에 도착하니 더워서 벗어서 팔에 걸고 있던 기억이 난다.
멀리까지 가는 터라, 시간 여유를 두고 가서 나는 창원의 집 마당에 예식 진행 업체 분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땡볕에 혼자 서성대니 그제야 전통혼례복을 입은 진진과 처음 만나는 그의 남편이 보였다. 지금도 그의 남편은 머나먼 서울에서 창원까지 와 준 것도 모자라, 제일 먼저 와서 기다려준 친구가 있는 아내가 부럽다며 우리의 우정을 추켜세워준다.
나는 K 같은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났기에, 사람들 사귀기를 꺼린다. 일종의 인간혐오도 있다. 그러나 진진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순수한 마음을 지키며 정연답게 살아올 수 있었고, 글을 써올 수 있었다. K 같은 사람들만 만났다면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 수는 없었을게다.
이제 나의 다음 꿈은, 진진의 아들 산이의 결혼식에 곱고 건강한 모습으로 참석하는 것이다. 아, 일단 초등학교 졸업식부터 갈까?산이는 정연을 제일 예쁜 이모라고 주장하니까, 산이를 만나지 못한 동안 불어난 체중을 줄여야겠다. 오늘은 굶어야 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