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이었네요. 엄마의 이상징후가 발견된 것이요.
엄마가 시집을 잘못 왔습니다. 사실 참 예쁘고 똑똑하고 야무진 여성인데요, 80년대 후반 그 시절에 남들 다 하는 결혼을 안 하고 있다가 급히 소개받아 키 크고 허우대 멀쩡하지만 말을 안 하는 남자를 만나 6개월인가 1년인가 만나다 결혼을 했대요.
엄마가 자그마해서, 키가 177cm나 되는 잘 생긴 남자를 보고는 '애들 키랑 인물 걱정은 없겠다.' 싶어서 안심하고 결혼을 했는데 말이지요.
그 남자의 인물은 보다시피 정연이에게 왔고 정남이에게는 키가 갔습니다. 저는 키가 작아서 슬픈 짐승. 덕분에 몇 년 전까지는 정남이랑 정연이 둘이 다니면 당연히 정남이가 오빠인 줄 알아서 정남이가 콧구멍 벌름거리며 분노하는 일이 무척 잦았습니다.
사실 지금은 정연이가 팍 삭아서 누가 여동생이라고 오해해 주는 일이 없습니다. 나는 안 늙을 줄 알았는데, 오만한 착각이었습니다. '정연이는 정말 마음도 얼굴도 소녀 같아서, 40살이 돼도 그대로일 거야.' 하는 가스라이팅에 당했습니다. 40살 되기도 전에 늙을 줄이야.
그리고 말이 없던 그 남자는 사실 말이 없는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말주변이 없어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뿐이지요. 그리고 그 이는 불뚝 성질을 정연이와 정남이에게 고루 물려주었습니다. 특히 정연이에게 안 좋은 점을 많이도 물려주었답니다. 이런, 나쁜 아부지. 나에게 키나 주지, 이게 뭐요?
나쁜 아부지는 뭐... 나중에 차차 이야기하겠지만요. 나에게 큰 키 안 물려주고, 더러운 성질머리 물려주고, 게으른 습성을 물려주고. 하여간 정연에게는 안 좋은 건 다 물려주고, 사업도 두 번이나 말아 잡쉈습니다.
그렇다 보니 작디작은 엄마가 아주 오래 가장으로 살았고요. 혼자 벌어 식구들 입에 풀칠 정성스레 해주며 아부지 빚도 갚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엄마를 좀 도울 수 있을까 하던 찰나에 희귀 난치병에 걸려버리는 아주 흔해빠진 불행한 가정사입니다.
아부지는 전혀 의지가 되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처음에 정연이 병 얻었을 때야 울기도 했지만, 금방 그런 것 잊어버리고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하는 타입의 사람이어서 정연의 병 같은 건 잊어버린 것처럼 살더군요. 이제는 원망 따위 없지만, 20대에는 원망 많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형편에 엄마에게 정연은 마음의 남편이고, 의지할 수 있는 장남이었습니다. 정연이 아무리 아파도, 집에 큰 위기가 생기면 아주 냉철하게 나서서 정리하고 해결하는 능력은 있었거든요.
엄마는 앓는 소리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아무 소리 없이 묵묵히 걸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정남이가 20대 중반을 지나며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지금의 회사에 입사해서 승승장구하고. 정연도 제 몫을 하고 살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10년이 금세 지났습니다. 엄마는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렇게 단단했던 엄마에게서 이상징후가 발견되었습니다. 2022년 가을의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