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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명절

by 이정연


설을 앞둔 목요일. 휴일인 딸은 혼자 마트를 다녀오고 분주하다.


정남은 명절에 먹는 나물을 무척 좋아한다. 나이 든 딸은 정남을 생각해서 어느 명절이든 반드시 나물 5가지를 기본으로 하고, 간단하게 음식을 마련한다. 정남을 위해서 콩나물, 시금치, 무나물, 고사리, 도라지는 꼭 하고 소고기를 넣고 탕국을 끓인다. 투정이 없는 정남은 그 나물을 모두 넣고 밥을 비벼서 내리 8끼를 먹곤 한다. 경상도 취향대로 헛제삿밥 스타일로도 먹고 속이 좀 느글거린다 싶을 때는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기도 한다.


이번 설에도 정남을 위해, 소박하게라도 설음식을 준비하겠다는 마음으로 아주 열심히인 딸.

그래. 명절에는 알아서 해 보아라. 정연 엄마는 방문을 닫고 드러누웠다. 아, 빨래 널어야지. 빨래를 널겠다고 밖으로 나갔다가 주방에 잠시 기웃. 그대로 퍼질러 앉아 버렸다. 나이 든 딸이 이제 막 전을 부치려고 주방 바닥에 신문을 깔고 가스버너와 프라이팬까지 다 준비해 둔 모습을 보고서, 그냥 내가 손을 대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나겠지 싶은 마음이 들어서 도와주려는 것이다.


그렇게 마주 앉은 정연엄마와 나이 든 딸. 그러나 금방 역할이 뒤바뀌어버렸다. 정연엄마는 성질이 못 되어먹어서 그냥 뒤지개를 본인이 잡아버렸다. 그리고 진두지휘를 시작한다. "식용유가 부족하네."

우리 딸은 마트에 사러 가는 것은 또 엄청 잘해서, 식용유 없다고 하니 대번 집 앞 편의점에라도 달려갈 기세다. 딸을 말렸다. "여기 정남이가 1차로 받아온 선물세트에 식용유가 있을 건데. 기다려봐요." 역시나 정남이가 가져온 사원용 선물세트에 식용유가 있다. 전체 사원들에게 똑같이 주는 선물세트가 있고, 정남이 같은 팀장급 이상은 또 따로 받는 선물세트가 있다. 아기 같았던 정남이가 받아온 명절 선물세트를 볼 때마다, 정말로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난다.


깔끔하게 부침개들을 부쳐낸다. 호박전을 어여쁘게 부쳐내고 동태 전, 대구전도 부친다. 대구전은 이번 명절에 처음 부쳐보는데 살이 정말 잘 바스러져서 절로 조심하게 되었다. 딸이 이미 재료 준비를 마쳐둔 상태로 부침가루를 무쳐서 내 곁에 있는 계란물에 담가주면 내가 조심히 팬에 지져내는 식으로 협업을 했다. 팬을 깨끗하게 닦아내고 이것저것 부치면서 깨닫는다. 불을 세게 올려서도 안되고, 급하게 뒤집어서도 안된다. 천천히 익기를 기다려 조심스럽게 뒤집어줘야 한다. 그렇다고 마냥 익기를 기다려 태워서도 안된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기다리되 신속하게.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는 일도 전을 부치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동그랑땡과 두부까지 모조리 다 부치고 나서, 딸이 새로 사다 놓은 정리 트레이에 부쳐둔 것들을 종류대로 가지런히 넣었다. 보기에 좋아 사진을 찍어 정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와~ 진짜 많이 했네? 맛있겠다!" 감동받은 정남의 마음이, 설 명절을 기대하는 정남의 기쁨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딸 혼자 하도록 내버려 뒀어도 분명 알아서 하긴 했을 테지만, 내가 손을 보태니 정말 일이 빠르게 끝났다. 함께 음식을 하니 딸이 정말 행복해했다. 목요일을 그렇게 딸과 함께 굽고 지지는 음식을 했고, 금요일에는 딸이 혼자 나물 다섯 가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돼지고기 수육을 삶아내고, 소고기와 무를 듬뿍 넣고 탕국을 끓였다. 명절 음식 마련한 이후의 뒷설거지도, 명절 동안의 설거지도 딸이 했다. 그냥 딸이 하도록 내버려 두고 격려해 주었다.


금요일 투석을 다녀온 점심, 명절처럼 다 같이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설 당일에는 딸이 출근했다. 나도 카페 알바는 평소처럼 해야 했기에 로봇을 닦아주러 나갔었다. 정남은 꿋꿋하게 혼자 나물밥을 찾아먹었다. 명절 연휴의 마지막 날인 월요일에는 투석이 끝난 후, 온 가족 나들이를 갔다.

남들처럼 많은 수의 가족이 모이는 명절은 아니었지만, 소박하고 따스한 우리만의 명절을 그렇게 보냈다. 남과 같지 않아도, 나는 늘 나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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