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1970년대 후반,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아버님은 어린 시절부터 서울 성북 쪽에서 과수원을 하셨다고 한다. 그녀의 나이가 그리 많지도 않은데, 서울 시내에서 과일을 키우다니 말이 안 될 것 같지만 그녀의 대학시절까지는 서울도 그러했단다. 사과인지 배인지를 키우셨다는 이야기에 신기하여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그렇게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과수원 앞에는 또 대학이 있어 도시 속에서 고즈넉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간호대학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그녀의 간호대학 동기들은 가끔 서울에서 과수원을 하는 그녀의 집에 놀러 오곤 하였는데 서울 대학가 근처에 있는 과수원이라며 다들 폭소를 하며 신기해했다는 후문이다.
그런 서울내기인 그녀에게는 아주아주 은밀한 꿈이 하나 있었는데, 부산에 가서 살고 싶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친척 중에 지방에 사는 이도 없거니와 부산과는 아무런 인연의 끈도 없는데 언제부턴가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생각이 자리 잡았다. '정말 부산에 가서 살고 싶다. 왠지 부산에 가서 살게 될 것만 같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고 2년 정도 흘렀을 때였을까. 그녀는 소개팅을 했다. 상대 남성은 키가 훤칠한 사람으로 둘은 사랑에 빠졌고, 1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남편은 경상남도 출신의 사람으로, 공학을 전공했는데 결혼과 동시에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그의 근무지로 내려갔다. 그곳은 부산이었다.
예전의 수 선생님이었던 박 선생님에게 들었던 이 운명 같은 이야기를 나는 좋아한다.
나는 운명론자였고, 사랑을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랜 투병 생활이 이어지면서, 내게는 운명도 사랑도 있을 수 없는 단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서른이 지나면서는 그런 마음이 더욱 굳어졌다. 어느 날 박 선생님과 지혈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인생의 가능성'이 화두에 올랐다. 이야기가 어쩌다 보니 연애 같은 쪽으로 흘렀고, 나는 씁쓸하고도 발랄하게 웃으며 "쌤, 전 귀엽지만 모쏠이라서요. 서른도 넘었잖아요. 어차피 안 돼요. 제 주변 친구들은 벌써 연애만 살아온 날의 1/3 이상 했다고요. 그리고 저 보세요. 맨날 만나는 남자라고는 우리 병원 할아버지들하고 버스기사님들밖에 없어요."
그 시절의 나는 항상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었다. 나의 이 말에 그녀가 꺼낸 이야기가 바로 위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발령으로 부산에 내려가 신혼생활 2년을 보냈다고 한다.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지만, 왠지 부산에서 살게 될 것 같았던 그 예감 혹은 가능성이 정말 실제가 되었고 지금도 잊을 수 없을 만큼 부산에서의 생활이 행복했다는 그녀의 말. 그러니 내게 꿈을 꾸라고 그녀는 말했다. 인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우리 그 누구도 알 수가 없어. 꿈을 꾸고, 인생의 가능성을 믿어.
그래, 작가가 될 줄 몰랐다. 박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던 그때에는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며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될 줄 몰랐고, 내 생의 인연은 내가 걷는 길에만 한정되어 있는 줄 알았다. 작가가 되었고, 사진을 찍으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절대 알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일들을 꿈꾸며 살고 싶다. 당신도 막연하고 즐거운 상상을 한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