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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Jun 07. 2024

경주의 다정함

(007)





경주는 내 책에도 등장한 적이 있는 이름이다. 캬,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너무도 멋지다. 내 책에 등장한 적이 있는 이름이라니!


경주는 나보다 몇 살 의 간호사다. 처음 이 병원으로 옮겼을 때 가장 자주 니들링을 해주러 왔었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이끌리는 편안한 사람이었다. 경주는 눈이 참 맑 예쁘다. 꼭 한지민의 눈 같다. 키는 자그맣고 통해서 친밀한 느낌이 든다.


다정한 눈빛에 비해 무덤덤한 경주의 태도가 나는 좋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 쓸데없이 다정을 베풀어서 남에게 기대를 주었다가, 나의 실체를 까발려서 실망하게 하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늘 경주와 같은 사람들을 담백, 하다고 표현하는데 나도 저런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대체로 뜨겁고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기에, 조차도 스스로가 퍽 힘겨울 때가 다.



작년이었던가. 혼자 하얀 셔츠를 입고 대학병원에 갔다.  내가 좋아하는 하얀 셔츠 중 5부 소매를 입었던 것이 방금 떠올랐다. 그렇다는 것은 딱 날씨가 이런 때라는 것이다.

이 말을 내뱉고 핸드폰 달력을 찾았더니, 딱 5월 30일에 청색 스케줄이 쓰여있다. 대학병원 스케줄은 청색으로 표시한다.

갑자기 벌에 쏘인 것처럼 부어오른 병변에서 통증과 염증 반응이 보여서 대학병원의 피부과로 갔었다. 교수님과 대면 진료를 보고, 바로 시술실로 들어가 드러누운 후 국부 마취를 하고 살을 조금 찢었다. 여자 선생님은 아주 애를 쓰며 병변을 쥐어짜 내었다.

꿰매지 않고 그냥 열어 두었다.  위에 처치를 하고 거즈와 테이프를 바르고 나왔다. 국부 마취를 해도 아파해서, 마취를 더했었다. 그럼에도 시술이 끝난 후 마취는 금방 풀리고 메스로 찢어놓은 살은 쓰라리기 그지없어 눈물이 찔끔 났다.

복부에 자상을 입은 독립투사 같은 상태로, 시술 자리를 가벼이 움켜쥐고 전철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피는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그토록 힘들게 시술을 받은 지 1년이 채 못 되어 병변은 재발을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난해의 병변보다 인내심이 부족한 친구다. 주말에 샤워를 하던 중에 터져버렸다. 제기랄. 피와 노란 물이 작은 항아리 깨진 틈에서 물이 새듯 계속 배어 나왔다.


월요일 아침, 경주가 니들링을 하러 왔기에 이 병변에 대해 고백을 했다. 티셔츠를 들어 올리고 밴드로 덮인 병변을 보이기도 했다. 투석치료를 하는 4시간 동안 아주 정신없이 푹 잤다. 자고 일어났더니, 말부터 내내 아팠던 병변에 그다지 통증이 없었다. 순식간에 피부과에 가 보려던 마음이 돌변했다.

지나가는 경주에게 "쌤, 오늘 안 가고 내일 피부과 가 봐도 별 문제없을까요" 경주는 내 침대 가까이로 와서 이불로 내 몸을 가려주었다. 나는 아예 밴드를 떼어내고 병변을 보였다. 경주는 싱긋 웃으며 별일 있겠냐고 한다.


경주는 참으로 큰 표정의 변화 없이, 딱히 다정한 단어를 고르지 않아도 담백하게 다정하다. 호들갑스럽지 않은 다정함이 참으로 좋다. 그래서 나도 호들갑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오늘도 차분하게 나를 가라앉힌다.

투석치료가 끝난 뒤, 대기실에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지나치며 재료실로 들어가던 경주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다. 잘 웃지 않던 사람의 미소에는 정말 큰 힘이 있구나.

"아직도 안 가고 뭐해요, 정연씨?"

경주의 조금 낮아서 편안하게 귓전을 울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다. 정말로, 호들갑스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경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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