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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연 Jun 13. 2024

10대 정연은 길을 건넌다.




피지낭종이 재발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주 전은 되었을 것 같다. 참는 것은 도사다. 그러니 참고 또 참았다. 실은 메스로 살을 살짝 찢어서 치료했던, 작년의 날카로운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다시 병원 가기를 망설였다.

걸핏하면 대학병원에 간다고 우리 친구님들이 나를 오해하실 수도 있지만, 작은 병원에 가면 '희귀 난치병' 환자를 대면한 선생님들이 치료를 두려워하는 일이 많기에 웬만한 일은 대학병원에 간다. 이번에도 같은 자리에 낭종이 볼록하게 올라왔다. 그대로 두고 보았더니, 샤워하는 도중에 낭종이 터져버렸다. 피와 고름이 새어 나와서 밴드로 막아두었다. 파업이슈도 있고 이미 낭종이 터졌으니 투석하고 근처 피부과에 가서 낭종을 치료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막상 투석이 끝나고 나니 피로감이 몰려와서, 그냥 화요일이나 수요일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귀가를 했다.

화요일에는 갑자기 일을 보러 다른 지방에 가게 되었다. 며칠 동안 칼로 환부를 썰어대는 것 같은 격렬한 통증에 시달렸지만, 화요일에는 겨우 견딜만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수요일, 나의 피지낭종 소식이 원장님에게까지 전해졌다. 아침 회진 때 원장님은 "친한 친구가 성형외과 전문의인데, 여기서 가까운 곳에서 병원 운영하니까 거기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해요."

얼떨결에 대답을 하였지만, 사실 오늘 세수를 하지 않고 나왔다. 이런 상태로 낯선 곳에 가려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리고 원장님이 알려주신 성형외과를 찾아보았지만 아주 먼 위치에 있다는 검색결과가 나왔다. 원래 우리 병원과 전철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던 병원이 일산에서 가까운 위치로 이사를 했던 것이다. '세수도 안 했는데, 고작 이걸로 성형외과까지 가야 해?'

성형외과에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려고 외래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거리가 멀어서..."

("아빠 나 굳이 머나먼 강남까지 학원 안 다니고 싶은데.. 그냥 동네 학원 가면 안 돼요?")

"흉 질까 봐 그러는 거니까, 성형외과 무조건 가세요. 기본요금밖에 안 나와요."

동네 학원에 그냥 다니겠다고 설득하러 갔다가, 깨갱하고 나오는 딸의 마음이 되었다. 저런 매서운 눈빛이라니. 원장님이 저렇게 세모눈을 뜨는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나는 동네 학원 다니고도 잘할 수 있다고 설득하러 들어갔던 건데, 말 한마디도 제대로 꺼내보지 못하고 알겠습니다 하고 뒷걸음질 쳐서 나왔다.

그렇게 신장실로 돌아와 "원장님이 너무 단호하게 가라고 하시네요. 거기 먼데... 자꾸 택시 기본요금이라고 하세요."

그랬더니 란쌤과 윤미쌤이 내 곁에 서서 얘기를 유심히 듣는다.

"리을역에서 이사 간 지가 언젠데."

"그러니까요.. 엄청 멀던데."

택시비로만 만오천 원은 족히 나올 거리였다. 투석 끝나자마자 다음 병원에 갈 요량으로 일찍 출근하느라 벌써 아침에 택시비를 써버린 정연은 정말 쪼잔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버스를 타면 온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서 가니 3-40분은 걸릴터이고, 버스도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 위치다.

"내가 정연씨 태우고 가면 딱 좋은데."

윤미쌤이 나서주셨다.

"근데 나 퇴근하려면, 정연씨가 나를 1시간은 기다려야 하는데. 기다리는 거 괜찮을까?"

걱정을 하는 윤미쌤에게 환한 미소로 기다리겠다고 씩씩하게 대답을 했다. 평소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이정연이지만 오늘은 세수도 안 한 상태라 따지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남의 차 좀 얻어 타겠다고 뻔뻔하게 대기실에 앉아 있는 꼴이라니. 아휴. 오늘만 뻔뻔해지자.

윤미 쌤을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고, 퇴근한 선생님 차에 올라타 둘이 담소를 나누며 목적지까지 가니 금방 도착했다. 성형외과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어 윤미 쌤은 대형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를 스타벅스로 데려갔다. 공복으로 투석을 했는데 점심시간까지 되었다며 걱정이 된 윤미쌤이 우겼다. "정연씨, 내가 음료 쿠폰이 있어서 사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골라도 돼." 차를 얻어 탄 것으로도 너무 감사한데. 차와 케이크까지 대접을 받았다. "나는 장 보고 갈 테니까 정연씨 천천히 먹고 시간 맞춰서 병원 가서 치료 잘 받고 가~"

엄마 장 보고 올 테니 넌 케이크 먹고 학원 갔다 와. 꼭 그렇게 말하는 엄마 같았다. 환부에 신경 쓰느라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혼자 앉아 케이크 하나를 야무지게 다 먹었다.

평소 모든 병원 스케줄을 혼자 소화하는 일상에, 갑자기 낯선 동네와 낯선 병원이라는 과제가 주어져서 당황했다. 그러나 나를 독려하는 아빠 같은 원장님, 나를 살뜰히 챙겨주는 엄마 같은 치프 윤미쌤 덕분에 오랜만에 가족의 울타리 속에 보호 받는 10대가 된 것만 같았다.  

평소 다른 환자들에게는 꼭 어느 병원을 가라,는 등의 잔소리를 절대 하시지 않는다는 원장님이 유독 내게만 세모눈을 뜨셔서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껴졌는데 정말로 나를 많이 생각하고 걱정하셔서라는 윤미 쌤의 이야기에 겸허해졌다. 벌써 지금의 원장님, 병원식구들과 함께 한 지 3년이 가까워지는데도 늘 나도 모르게 마음의 선을 그었다.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되도록이면 혼자 해결하려 하였다. 처음에는 책 출간에 관해서도 병원의 모두에게 알릴 생각은 하지 않았던 나였는데, 얼마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았던가.

"맨날 등산 같이 가는 친한 친구니까, 내 이름 대면 정말 잘 봐줄 거예요. 이건 꼭 외과에 가야하는거야."

그래, 아침 회진 때 그렇게 말씀하시던 원장님의 눈빛이 얼마나 따스했던가. 아픈 일도, 살아가는 일도 절대 혼자서는 해나갈 수 없다. 생각하지 못한 때, 나를 걱정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인생길.  

오후 2시가 가까워지는 거리의 햇살이 뜨겁다.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길을 건넌다. 커다란 건물들이 만든 그늘로 뛰어든 내게로 시원한 초여름의 바람이 훅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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