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SNS에서 '원영적 사고'라는 말을 쓰는 분을 보았다. 대단한 어휘력을 가지진 않았지만, 남들이 아는 말은 거의 다 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태어나 원영적 사고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본 나는 당황했다. 한자어 같은데 무슨 뜻일까. 단어만으로는 의미를 유추할 수 없어서 혼자 고뇌에 빠졌다. 더군다나 그 단어를 사용하는 분이 변호사님이어서 내가 모르는 어려운 단어일 수도 있겠구나 실의에 빠졌던 찰나, 우연히 원영적 사고 속의 '원영'이 여자 아이돌임을 알고 폭소를 했다. 어휘력의 부족은 늘 느끼지만, 그래도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행하는 밈이야 모를 수도 있지.
혹시 이 원영적 사고에 대해 모르는 분이 계실까 봐 아주 간단하게 설명을 하자면, 낙천주의에 가까운 긍정적 사고를 하는 한 여자 아이돌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의 사람이 빵을 모두 사가는 바람에 (빵을 못 살 뻔했으나, 새 빵이 나와서) 따끈한 새 빵을 살 수 있었으니 럭키비키잖앙? 뭐 이런 사고의 흐름이라고 한다. 오히려 좋아, 20살 장원영의 멋진 긍정의 자세다.
근데 이 사고 이미 정연이 하고 있던 거잖아. 왜 이정연이 할 땐 유행하지 않았던 거야? 병팔이 아이돌의 자존심으로, 귀여운 척하며 내가 원조라고 우겨보았다.
나는 '소설가 이은정'을 정말 좋아한다. 그녀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통해 이야기할 생각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이은정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잊지 않고 선물하고, 누가 물을 때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이은정 소설가'라고 말할 정도로 좋아한다.
언제부턴가 타인의 책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게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유명한 소설들은 가끔 읽었지만, 읽고 나면 꼭 모방을 하고 싶어 져서 3년 정도 전부터는 거의 책을 끊다시피 했다. 브런치 글은 꾸준히 읽었고, 주변 작가님들의 신작은 챙겨 읽으려 노력하였지만 웬만하면 책을 읽지 않았다. 거짓부렁도 핑계도 아니다. 유명 소설가의 소설을 읽은 후에는 꼭 그의 문체를 따라 쓰기 시작했고, 문장을 써내는 사고도 그 작품세계를 모방하곤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책 읽기를 과감히 멈추었다. 나의 목소리가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모방만 하다가 나의 글이 끝날 것만 같아서. 변명 같지만 나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책을 읽지 않았다.
그런 내가 우연히 이은정 작가님의 강의를 듣게 됐고, 강의를 듣는 사람의 기본자세로 그녀의 책을 두어 권 샀던 것이 이 마음의 시작이었다. 강의를 들었더니 정말 멋진 분이었고, 너무 오랫동안 책을 읽지 않았던 탓에 쉬이 잡히지 않던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순간 알았다. '이 사람은 찐이다!' 그렇게 그녀의 신작 소설이 나온 것을 또 사서 읽고, 새 소설집 '비대칭 인간'이 출간되자마자 여러 권 사서 책장에 꽂아두고, 좋아하는 친구들에게도 선물했다. 그리고 그즈음에는 한창 투고로 여러 출판사와 연락이 오가던 때라 '비대칭 인간'은 바로 읽지를 못했다. 왠지 아껴두었다 읽고 싶은 이상한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서야 그녀의 소설집 '비대칭 인간'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시작하자마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금세 제동이 걸렸다. 어라, 이거 왜 연결이 안 되는 거지? 드디어 나의 문해력에 문제가 생겼구나. 당연히 이은정 작가를 의심하지 않았고, 출판사 득수를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평소 책을 읽지 않는 버릇을 가진 '이정연' 하나만을 의심했다. 그냥 페이지 순서대로 읽다가, 그래도 내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인데... 문학사학위도 있는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문해력이 떨어질 수가 있단 말인가? 책도 출간한 작가인데? 그 지점에 생각이 이르자, 나의 문해력이 이토록 엉망일 수는 없다 싶어졌다. 그래서는 안된다. 이상한 느낌에 페이지 하단의 숫자를 보았다. 16 다음에 21이 와 있다. 아, 다행이다. 아직 나의 문해력에는 문제가 없었구나. 나는 고맙고도 기쁜 마음이 되어, 손가락을 책 페이지 사이사이에 끼워두고 왔다 갔다 하며 읽었다. 책은 그 부분만 페이지가 엉켜 있었다.
그렇게 읽었음에도 그 단편소설은 너무도 강렬하고 아름답게 내 기억 속에 남았다. 그리고 알았다. 내가 스스로 페이지를 맞춰가며 읽어야 하더라도 이은정 작가이기에, 그녀의 작품이기에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새삼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낄 수 있었기에 오히려 내게는 고마운 파본이기도 했다. 책이란 제본을 하다 보면 얼마든지 문제가 생길 수 있고, 파본이라는 것이 내게는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잘못된 책은 출판사에서 바꾸어 드립니다'가 원래 기본값이지만, 나는 바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은정 작가에 대한 나의 마음을 느끼게 한 이 파본에 대해 어느 짧은 글로 언급했다. 파본을 폭로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고, 내가 얼마나 이은정 작가를 사랑하는지 알게 한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게도, 출판사 득수의 대표 김강 선생님이 내 짧은 글을 읽으셨고 대번에 장문의 사과 메시지가 왔다. 그리고 나는 책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인덱스를 모두 떼어내 버리고 득수의 책방 '수북'으로 파본을 보냈다. (수북은 출판사 득수에서 운영하는 책방이다.) 그리고 오늘 책방 수북으로부터 택배가 도착했다.
'비대칭 인간' 새 책과김강 대표님이 집필에 참여하신 공저작'쇼팽을 읽다', 예쁜 엽서 세트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택배를 직접 챙겨 보내주신 것 같은 수북책방지기인듯한 분의 따스한 친필 메시지 한 통이 고이 들어 있었다.
파본을 읽었지만, 이은정 작가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새삼 깨닫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득수와 수북 관계자 분들의 마음까지 받을 수 있었던 이번 에피소드. 내게는 정말 너무 따스한 한 편의 이야기로 남았다. 파본 정말 럭키비키, 아니 럭키정연이잖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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