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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슬 Feb 06. 2021

사후피임약에 대하여

다신 먹을 일이 없기를

남녀 간의 성관계를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각종 피임법에 대해 한 번쯤 찾아보거나 생각해봤을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콘돔을 사용하는 것부터, 여성이 생리 주기에 맞춰서 피임약을 복용하거나 남성이 본인의 조절력을 믿고 질외사정을 하는 등 다양한 피임법이 있다. 나 또한 보편적으로 많이들 행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봤는데, 그중 가장 내 몸에 미안했던 사후피임약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피임법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분명 학창 시절 성교육 시간이 있었고 그때도 뭔가를 배운 것 같기는 한데, 막상 필요한 순간이 되자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편하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인터넷에서 각종 뉴스와 칼럼을 통해 피임법을 다시 익혔다. 매번 내가 제대로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공교육을 받던 시절처럼 누군가 정답을 알려주거나 그에 걸맞은 시험 점수가 있는 것은 아니니 확신할 수 없는 불안함은 애정의 동반자였다.


‘대부분, 대체로, 구십오 퍼센트 이상, 거의, 보편적인’과 같은 수식어를 믿고 사랑을 나눠야 했다. 자연스럽게 매달 하는 생리는 이번 달 내가 제대로 피임을 했는지 확인하는 수단으로써의 새로운 의미가 더해졌다. 아랫배가 묵직한 생리의 기운이 찾아오면 신체 컨디션이 나빠지는 것보다 ‘이번 달도 무사했다.’는 정신적 안도감이 먼저 찾아왔다. 성공적인 성관계의 엔딩은 생리의 여부와 직결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피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별을 겪고도 생리 주기를 확인했다. 마지막 성관계로부터 일정 기간 안에 생리를 해야지만 제대로 이별할 수 있는 떳떳한 몸이 되는 것이다. 내 몸 하나를 오롯이 책임질 수 있는 한 달 생활비도 가까스로 버는 내가 피임마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암담했다. 


이런 불안한 마음에서 사후피임약을 먹게 되었다.


당시 남자 친구와 나는 둘 다 대학생이었다. 부모님에게 집을 의지하고 각자 과외와 아르바이트를 통해 겨우겨우 데이트 비용을 충당하는 이십 대 초반. 의도하지 않게 책임질 일을 벌이기엔 정말 건강하고, 진지하게 책임질 일을 생각하기엔 너무 어렸다. 그런 우리가 안전하게 서로를 지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수단은 바로 콘돔이었다. 저렴한 가격으로 최선의 수비를 해내는 도구. 커피 한 잔 가격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꼬박꼬박 콘돔을 사용한다고 해서 백 퍼센트 완벽한 피임이 되지는 않는다. 시작과 끝에 콘돔이 찢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있어도 수치상 약 십 퍼센트 정도는 실패할 확률이 있다. 그런데 만약 사용하던 콘돔이 벗겨지거나 찢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한숨부터 나오는 그 상황이 우리에게도 펼쳐졌다. 서로를 향한 애정을 기반으로 시작한 사랑의 마무리가 한숨과 불안과 초조함과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이라니.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겠어? 에이, 임신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될 리 없지.’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내가 임신을 한다면 당장 동아리 공연은 어떡하지? 어제 마신 술은 괜찮을까? 엄마랑 아빠는 일단 현관 비밀번호를 바꾸실 거고, 그럼 제주도 비행기를 끊어서 당분간 할머니 집에 가 있어야겠다. 오빠는 낳자고 할까?’ 하는 오만가지 상상이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남자 친구가 먼저 조심스럽게 사후피임약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우선, 미안하다고. 같이 해놓고 정작 책임은 네가 지는 것 같다고. 몸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는 하는데, 너무 불안하다고. 아직은 그런 일이 생기면 책임질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전화기 너머로 철썩이는 초조한 목소리에 내 마음에도 불안함이 파도쳐왔다. 사후피임약은 최대 72시간 안에는 먹어야 하고, 48시간 이내에 먹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고 했다. 우리에겐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일 분이라도 72시간에 가까워지기 전에 결정해야 했다. 


나는 애써 괜찮은 목소리로 병원을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동아리 공연 지원금을 받기 위해 들른 적이 있는 산부인과로 향했다. 그때보다는 조금 더 진지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의사 선생님과 조우했다. 


“부작용이 많이 심할까요?”


축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의사 선생님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이것도 ‘약’이라서 부작용이 정말 심각할 정도면 약이 될 수 없다는 말을 처방전과 함께 건네셨다. 


사후피임약을 먹고 난 후, 두통과 어지러움, 설사를 겪었다. 심리적으로 많이 긴장했는지 혹은 약의 부작용인지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아팠다. 내 몸에 미안했다. 그리고 얼마 뒤 제대로 생리가 시작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과 불안과 초조함과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 이후로 다시는 사후피임약을 먹지 않았다. 몸으로 체감하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다시 생리할 때까지 내가 느껴야 했던 불안전한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순간에 시험대에 올리는 과정이 썩 편하지 않았다. 물론 사후피임약은 인생이 바뀔만한 실수를 막아주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다. 하지만 나는 혹시나 임신하더라도 행동에 책임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이후의 성관계를 갖기로 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미리 많은 준비와 공부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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