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아침 수업이 끝날 무렵, 아빠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잠시 멈칫하다 아빠와의 가장 최근 대화를 떠올렸다.
'아, 어제가 어버이날이었지.'
하루가 지나고 온 메시지.
'고맙다'는 단 세 글자.
생각해보니 전날 카톡 창을 기준으로 스무 줄 가량의 감사인사와 함께 용돈을 보냈는데, 이 아저씨는 함축의 정석. 딱 세 글자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아빠에게 오랜 시간 단련된 나는 저 세 글자가 어떤 사고체계를 거쳐 어떻게 나왔는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알이 뜨거워진다.
에잇. 또 쓸데없이.
휴대폰 화면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혼자 곱씹다가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 휴지를 찾는다. 저 세 글자가 뭐라고.
아빠는 나를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만드는 재주가 있다. 아빠랑 똑같이 대화할 거라고 입을 꾹 닫은 채로 몇백 번 몇천 번 마음을 먹다가도, 툭 던진 한마디에 꼭꼭 감춰뒀던 꼬리가 어느새 흔들흔들. 기다렸던 말들이 줄줄 나온다. 아빠는 이런 내 마음을 알까 몰라. 가끔은 대답 없는 녹음기에 속마음을 털어놓는 기분이다. 그러다 보면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빠의 행간을 상상하는데 능통해진다. 인간관계를 맺어갈 때 누군가와 대화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건 이런 아빠 덕분일지도 모른다.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인간관계.
그런 아빠를 이해하는데 꼬박 삼십 년을 넘게 썼지만, 지금도 나는 아빠의 취향, 아빠의 꿈, 아빠의 행복이 뭔지 잘 모르겠다. 그저 당신이 뭘 좋아할지 몰라 이것저것 다 준비해 봤어요, 상태로 아빠를 대해볼 뿐. 그러다 뭐 한두 개 얻어걸리면 뿌듯한 거지.
그럼에도 신기한 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이상형의 일 번은 아빠 같은 사람이었다. 키 크고 잘생긴 외형은 물론이고, 아빠의 그 대쪽 같은 신념이 나는 좋았다. 스승의 날에 안 주고 안 받기 운동을 하는 선생님. 누군가 교감실에 몰래 두고 간 선물을 도로 가져가라고 CCTV를 돌려보겠다고 안내방송을 하는 빡빡한 사람. 엄마랑 가면 유치원생이 되는 놀이동산이 아빠랑 가면 당당하게 초등학생이 되는 것도. 누군가는 융통성이 없다 말할 수 있는 그 한결같음이 어릴 때부터 좋았다. 긴 침묵을 뚫고 나오는 한 마디의 무게감. 아빠가 뭔가를 말하면 그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던 걸까. 그런 아빠를 답답해하면서도 좋아하고, 계속해서 아빠 곁을 강아지처럼 맴도는 건 정말 미스터리다.
남들은 딸 바보라며 공주니 딸랭구니 뭐니하는 애칭으로 딸을 부른다지만 우리 아빠는 그런 법이 없었다.
"객관적으로 예슬이가 예쁜 편은 아니지!"
봐라. 이 한결같음.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이런 부분에선 나도 아빠를 닮아 진심이 없는 듣기만 좋은 칭찬은 잘 못한다.
또 아빠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집 안밖의 모습이 가장 다른 사람이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에 많은 말을 꺼내는 사람이라 그런가. 집에서는 에너지 충전이 필요한지 말이 없다. 한 번씩 아빠의 대외적 이미지에 익숙한 지인 분을 만날 때면 ‘우리 아빠가 이런 모습도 있구나’싶은 이야기들이 많다. 듣다 보면 아빠가 조금 멀게 느껴질 때도 있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가장 가까워야 할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은 나와 당신의 거리를 서운하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도 내가 오랫동안 연습한 한 가지다.
최근 몇 년간은 비교적 아빠와의 대화가 많았던 시기다. 가족을 소재로 하는 연극을 만들면서 아빠를 아빠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고, 연극을 준비하며 촬영한 영상 속 아빠와 나의 투샷이 매스컴에 나오기도 했다. 처음으로 아빠가 내 일을 궁금해했고, 공연장에 본인 친구들을 잔뜩 데려와 나를 당황시켰다.
참 알아도 알아도 모르겠는 양파 같은 아저씨.
그게 우리 아빠다.
글을 쓰며 좀 정리하고자 했지만, 대실패다. 써도 잘 모르겠고 하나의 줄기로 정리가 안 된다. 앞으로도 나는 아빠에 대해서 모르는 걸 계속 발견하고, 평생 그 사람을 알아만 가겠지. 그가 나를 사랑하는 온갖 방법을 탐구하면서 아빠의 행간을 읽고 또 눈물을 그렁그렁 흘릴 것이 분명하다.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그렇지만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 난 이렇게 아빠를 평생 짝사랑 할 것 같다.
아빠와의 앞으로는 또 어떨까.
그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아마 나는 그런 아빠 곁에서 끊임없이 쫑알쫑알 말을 걸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오늘은 뭐해요?"
"요즘 무릎은 안 아파요?"
"운동은 했어요?"
"밥은 뭐 먹었어요?"
"이 영화 봤어요?"
"다음 병원 예약은 언제예요?"
"이번 연휴에 서울 올라올 거죠?"
"산책하러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