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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시 Mar 05. 2020

검은 물 위의

희고 푸른 비늘






두꺼운 외투를 이제 막 벗어던진 어느 여린 봄날의 풍경은 연푸른 빛으로 가득했다. 햇살이 넘실대는 5월의 잔디밭과 파란 하늘, 무성하게 자란 나무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은 노부부 한쌍,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를 펴고 앉은 분홍 솜사탕 아저씨, 두 손 꼭 잡고 그윽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커플들. 그런 것들을 찍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진으로 한가득 담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가 본 노란 유채꽃밭의 풍경을 똑같이 선물해주고 싶었다.





요즘 내 사진첩엔 좀 다른 종류의 사진들이 담겨있다. 벌거벗은 앙상한 나뭇가지들, 혹은 왜 길바닥에 버려졌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외로운 한 짝의 일회용 장갑, 어둡고 눅눅한 골목길 같은 것들 말이다. 차갑고 쓸쓸함 가득한 계절의 탓이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며칠 전, 출근길에 2018년에 방영했던 고등 래퍼 2 래퍼 빈첸(이병재)의 영상을 찾아봤다. 서울대 누나를 둔, 자퇴생 18살 고등학생 남자아이. 삶이 서글퍼 자신의 오른팔을 자꾸만 긁을 수밖에 없던 아이. 유명해지고 싶어서, 부자가 돼서 flex 하고 싶어서, 예쁜 여자들한테 허세를 부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치 암흑의 구렁텅이에 서 있는 자신을 스스로 구하고 싶어서 랩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명상 래퍼로 인기몰이를 하며 1위를 했던 하온이 보다도 병재의 공연들이 유독 잔상이 많이 남았는데 실제로 아는 사람도 아니면서 '요즘은 괜찮나? 뭐하고 지내나?' 그의 근황이 궁금할 정도로 마음이 쓰였다.






왜 축축한 암흑 같은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걸까. 좋은 일을 자랑하는 것은 쉽지만 어둠을 드러내는 것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일까.


진을 찍을 때에도 빛이 있으면 죽어있는 물건들 모두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후광을 입는다. 반대로 어둠 속에서는 좋은 사진 한 장을 건지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둠 속에서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어둠에 자꾸 시선이 가고 마음이 가는 건 어쩌면 쉽게 찾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어둠을 표현하는 용기가 발현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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