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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를그리다 Aug 25. 2024

아동학대를 대처하는 방법

엄마 어렸을 적엔 - 10-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 베트남 학생이 있다. 2학년 남자아이로 베트남인 엄마와 한국인 아빠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다. 피부도 하얗고 잘 생긴 이 아이는 주 양육자인 엄마와 대화하는 시간이 아빠보다 당연히 더 많았다. 그런데 다른 다문화 가정의 케이스와는 다르게 한국에서 태어나고 쭉 한국에서 살다 보니 엄마는 아이와 한국어로 대화를 한 듯하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베트남어는 전혀 모르고 한국어만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베트남인 엄마의 한국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엄마의 잘못된 발음으로 한국어를 배운 탓에 발음이 너무 엉망이라 아이가 하는 말의 70%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아이는 한국어로 하는 모든 말을 다 알아듣고 대답을 하지만 그 대답을 알아듣지 못해 아이도 나도 서로 답답했던 적이 많다.

 "터태님, 어데 우디딥에 버레가 나닸더여."

 "응? 뭐라고?"

 "우디딥에 버레가 나닸다도요."

 "아, 어제 벌레가 나왔다고?"

 "네"

 여러 번 아이에게 물어서 최대한 유추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나마 아이의 말을 제법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귀를 의심하게 되는 말을 들었다.

 "터태님, 어데 아빠가 누나를 때뎠어요. 누나 어굴데도 멍 들덨어요."

 "누나가 아빠한테 맞았다고? 멍들 만큼?"

 아이가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건 비밀인데 하면서 아빠는 자주 누나를 때리고 그것도 얼굴에 멍이 들만큼 때린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아동학대인데... 어떡하지?'

아동학대로 의심되는 정황을 듣게 되자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지침대로라면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경우 교사로서 바로 신고하는 게 맞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생각을 가다듬고 사실 확인부터 해야지 싶어 쉬는 시간에 아이의 누나를 불렀다. 우리 반도 아니기에 담임선생님께는 동생문제로 잠시 도움을 요청한다는 핑계로 누나를 한국어 교실로 불러왔다.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살짝 데려가 아이에게 동생에게 들었는데 확인해 줄 말이 있다며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아빠가 때리니?"

 "....."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아이의 얼굴에 도드라지게 커 보이는 눈, 그 큰 눈의 눈동자가 제 자리를 모르는 듯 이리저리 불안한 듯 흔들렸다.

 "혹시 늘 긴팔을 입고 오는 게 멍든 것을 가리기 위해서니?"

 "...."

 어떤 질문을 해도 한국어를 모른다는 듯 마스크 안의 입은 무겁게 침묵하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 긴팔티셔츠에 바람막이까지 입은 아이가 베트남 사람이라 더위를 안 타나 보다 생각하고 싶었지만 목 위로 올라온 목티까지 입고 있다는 건 뭔가를 가리고 싶어 한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얼굴에 멍이들 정도로 때렸다는 동생의 말을 들었기에 아이의 얼굴에 있는 마스크도 분명 멍을 가리기 위함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미쳤지만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 아이에게서 더 확인할 건 없어 아이를 교실로 보내며 내가 전해 들은 상황을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의논드렸다. 하지만 선생님의 반응 역시 회의적이었다.

 사실 선생님께서도 이미 알계셨기에 학기 초반 부모님과 면담을 하고 경찰에 신고한 적도 있고 하신다. 하지만 아버지는 경찰 조사 후 훈육을 위한 체벌로 인정되어 훈방조치 후 집으로 돌아갔고, 아이는 그 이후 더 말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제야 아이의 묵묵부답의 이유가 짐작되었고, 결국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나는 우리 반 동생에게 만의 하나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하라며 내 전화번호를 적은 종이만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를 학대하는 집이 많아도 실상 교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아이의 부모에게 했더니 그 아버지는 고자질의 대가로 아이에게 더 큰 학대하거나, 경찰에게 신고해도 심각한 학대가 아니거나 마땅한 보호자가 없으면 결국 아이는 부모에게 인계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더군다나 이 아이의 외가댁은 지척도 아닌 머나먼 이국땅이지 않은가... 학대사실을 짐작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허무함과 무력나를 무겁게 짓눌다. 그리고 몇십 년 전 내가 예뻐했던 한 아기가 생각났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골목안쪽 집에서도 오른쪽 안쪽에서 두 번째 집이었다. 안쪽 첫 번째는 이모집, 두 번째는 우리 집, 우리 집 옆에는 한 살 된 아기와 6살 꼬마숙녀가 있는 이쁜 이모집, 제일 안쪽엔 골목 터줏대감 배 타는 아저씨네였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본인도 꼬마면서 나보다 어린아이들을 유난히 예뻐했는데 우리 옆집 아기들을 특히 예뻐했었다. 옆집 이모는 새하얀 얼굴에 야리야리한 몸으로 두 딸을 키웠는데 목소리도 나근나근한 데다  윗지방 억양이라 억센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다른 이웃과 달리 말투까지 고와 더욱 예뻐 보였다. 그런 이모를 닮아서 그런지 이모의 두 딸들도 내 눈에 무척이나 예뻤는 특히 둘째인 갓 돌 지난 아기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시간만 나면 옆집 아기를 보러 간 덕에 9살에 이미 아기 기저귀도 제법 능숙하게 갈았으며 미지근한 물에 분유를 타는 일도 그럴싸하게 했다. 가끔 옆집이모가 씻거나 할 때 나와 언니가 아기를 30분 정도 봐줄 때도 있었는데 직접 내손으로 돌봐주고 놀아줘서 그런지 더욱 옆집 동생들이 정이 갔다. 하지만 그 예쁜 아기와 이모가 옆집 아저씨 눈에는 안 예을까...

 여리한 이모와 달리 키가 크고 우람한 덩치의 아저씨는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주에 한번, 혹은 달에 한 번씩 집에 왔다. 그리고 아저씨가 집에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큰 소리가 났는데, 옆집이모와 아저씨의 고성과, 무언가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들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골목 안에 울려 퍼지곤 했다.

 우리는 옆집 이모네와 이어지는 벽 쪽으로 머리를, 이모집 쪽으로 다리가 가는 방향으로 한 방에 나란히 누워서 는데 그날따라 밤늦도록 옆집이모네 싸움소리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들려 쉬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술 취했는지 아저씨는 어눌한 발음으로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더니 얼마 뒤 "쿵"소리와 함께 자지러지는 아기 울음소리가 벽을 타고 크게 들려왔다. 평소 듣던 아기울음과는 다른 섬뜩한 소리에 불안과 함께 오소소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시 뒤 아기 울음소리도 끊기골목 안은 어둑한 밤처럼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싸움이 끝났나?'라고 안심하려는 찰나

 "아가야. 아가야.. 흑흑...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애처롭게 아기이름을 부르며 도움을 요청하는 옆집이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온 골목집 사람들이 다 옆집이모네로 모여들었다.

  "아기가 이상해요. 도와주세요. 흑흑흑"

 곱디고운 이모의 얼굴은 빨갛게 부어있었고, 늘 포니테일로 자연스럽게 묶여있던 머리는 산발되어 방금 전까지의 치열한 부부싸움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어찌할 줄 몰라 그저 입을 벌린 채 구경만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제일 연륜이 있는 주인아저씨가 정신을 차리고 옆집이모를 다독였다.

  "빨리 병원부터 갑시다."

 주인아저씨는 제정신이 아닌 옆집이모와 이모의 팔에 힘없이 늘어져있는 아기를 데리고 파란색 포터가 있는 골목 앞 공터로 뛰어갔다. 골목안쪽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했고 옆집 아저씨는 부뚜막 돌계단에 힘없이 앉아 넋을 놓고 있었다.

  "아고... 정신 나간 사람아. 아무리 화가 나도 어찌 아기를 던질 수 있나!! 천벌 받는다. 그 이쁜 것을..."

  여기저기 어른들의 수군거림 속에 모든 대화를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아기를 던졌다'는 그 한마디는  귀에 정확하게 꽂혔고, 내 심장은 두 방망이질 치기 작했다.

 "언니야, 아기 죽은 거 아니제?"

 " 함부로 말이라도 그런 말하는 거 아이다. 부정 탄다. 퉤 퉤 퉤. 그런 말 하지도 마라. 들어가서 자자 고마."

 다섯 살 많은 언니는 행여나 말이 씨가 될까 어린 동생의 입단속을 시키고 달래어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겨우 잠자리에 들어간 나는 이모가 언제 올까, 아기는 괜찮을까 하는 궁금함에 옆집에서 나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기다리다 지쳐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하지만 옆집아기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일 째 되는 날 큰 아이만 데리고 집으로 온 옆집 이모는 짐을 싸서 다시 나갔다. 병원에 좀 더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두개골골절로 한참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한 옆집이모네가 돌아왔을 때 너무 반가워 아기를 보러 달려갔다. 평소라면 목소리만 듣고 까르르 웃으며 나를 바라봤어야 할 아기가 어쩐 일인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귀가 잘 안 들려."

 체념한 듯 무심하게 내뱉는 그 말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두개골 손상과 함께 청각손상이 되었다는 그 말에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 옆집아저씨가 너무 미웠지만 아무것도 할 수없었다. 그저 홧김에 한 실수였다며 아저씨는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평생 장애라는,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무거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아기가 나중에 커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이런 아버지라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나은 걸까? 극심한 혼란과 증오, 무력감이 9살 소녀의 가슴에 새겨졌다.


 2014년 아동학대법이 제정되고, 4년 전 정인이 사건 이후 온 국민이 아동학대에 대해 더욱 큰 관심과 분노를 표출한 덕에 아동복지법이 한차례 개정되기도 다. 하지만 바뀐 법도 누군가의 폭력성을 막기엔 역부족인 끊임없이 아동학대 소식이 흘러나온다.

 "엄마, 왜 부모가 자식을 죽여?"

 "어린이집 선생님이 왜 아이를 때렸어?"

 뉴스에서 들리는 아동학대 소식에 아이가 물어보지만  내 아이에게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지 바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우리 학교 학생의 학대 상황을 알고도 교사로서 아무것도 도울 수 없었던 나는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는 거야."

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35년 전 그날 일은 되풀이되고 있지만 여전히 대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내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야할까?

 해결책 없는 의문과 답답함만이 도돌이표 되어 한없이 작아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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