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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를그리다 Aug 04. 2024

죽음 앞에선 누구나 동등하다

엄마 어렸을 적엔 -7-

 누구나 1년에 몇 번씩은 지인들의 경조사에 갈 일이 있다. 친구들 중에서도 비교적 늦게 결혼한 편인 남편과 나는 언젠가부터 결혼식보다는 장례식을 가게 될 일이 더 많아졌고, 어느 날 장례식의 손님이 아닌 상주가 되어버렸다.  

 우리 가족이 상주가 된 첫 장례식은  바로 시아버님의 장례식이었다. 여든이 한참 넘어 돌아가셨기에 아주 예상 못한 죽음이라 할 수는 없어도 우리 부부에겐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급작스럽게 찾아온 죽음이었다.

 장례식을 가본 횟수는 꽤 되지만 장례를 직접 치른 건 시아버님의 장례식이 처음이었기에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 부부는 밤 9시가 다 되어 차려진 빈소에 누가 올까 싶어 장례식장 측에서 음식준비에 대해 묻자 다음날부터 음식과 일손을 거들어줄 이모님 두 분을 부탁하고 텅 빈 빈소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몰아닥친 남편의 직장동료들에 음식도 없이 어쩌나 허둥지둥하며 장례 첫날을 보내게 되었다. 남편은 낮에 근무 중 아버지의 부고소식을 받아 바로 병원으로 왔었고 회사동료들도 이를 알기에 퇴근하자마자 모두 함께 장례식장으로 바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렇게 상주가 처음이었던 우리 부부는 장례식장에 온 손님을 빈손으로 보내며 우왕좌왕 버렸다. 게다가 아직 어렸던 우리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장례식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녔기에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게 보내었고 아이들이 잠들고 대부분의 장례식장 손님도 뜸해진 새벽 미명에서야 아버님이 돌아가셨단 걸 실감하게 되었다.

 아직 어렸던 6살, 5살 된 우리 집 첫째, 둘째는 사진 속에 계신 할아버지를 이제 볼 수 없냐며 묻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죽음이 무엇인지,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딱딱하고 불편한 바닥에서 왜 삼일이나 자야 하는지, 장난감이 있는 편안한 내 집에서 왜 놀 수 없는지 의아했을 뿐...

 '하긴... 죽음이란 걸 알기엔 너무 이른 나이일 테지... 고작 6살에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죽음'이란 단어를 처음 겪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인생에 만난 첫 죽음은 9살 무렵 이모부의 죽음이었다.


골목 안쪽 집의 첫 번째 집은 우리 엄마의 둘째 언니이자 나의 둘째 이모집이었다. 외할머니는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낳으셨는데 엄마는 딸 중 막내였다. 자매들 중 둘째 이모와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막내 삼촌과 가장 친했던 엄마는 집도 골목어귀에는 삼촌이 살고 옆에는 둘째 이모가 살고있는 골목길 안쪽 집으로 이사 다.  엄마가 일하러 갈 때면 우리 삼 남매는 이모네에서 종종 밥을 먹기도 하고 이모가 우리 집에 와서 밥을 차려주시기도 했다. 이모에겐 장성해서 일본으로 일하러 간 첫째 아들과 고등학생 둘째 아들이 있었는데  해외에 있는 아들과 공부하느라 늦은 시간에야 들어오는 사촌오빠를 대신해 우리 삼 남매가 이모, 이모부와 둥그런 밥상에 머리를 맞대고 한 식구처럼 식사를 했던 것이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유난히도 새까만 머리를 짧게 친 이모부의 인상은 제법 날카롭고 무서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무서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요즘으로 치면 아재개그, 그 당시로 치면 썰렁 개그를 종종 해주셨는데 그 덕인지 이모부와 밥 먹었던 시간이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 기억에 이모네 분홍색 커다란 꽃무늬의 양은 밥상 위에 차려진 음식들 사이로 항상 초록색 소주병도 함께 올라와 있었다. 알코올을 반주삼아 늘 소주잔을 기울이던 이모부의 어깨엔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지워져 있었는데 소주 한 모금을 마시며

 "캬~좋~다."

하는 소리를 자주 입밖에 내뱉었다. 어쩌면 이모부는 추임새 같은 소리와 함께 삶의 짐을 조금씩 뱉어 내었던 거 같다. 소주 한 모금에 고뇌 1그램, 소주 두 모금에 피로 1그램... 그렇게 매일 술로 조금씩 인생의 무게를 덜어내이모부는 술독에 빠져 결국 간경화란 지병을 얻고 내가 9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여느 날처럼 하교를 하고 집에 책가방만 던져놓나가려던 날, 이모집에 흰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궁금증에 의사 뒤를 따라가 이모네 집 부뚜막에 들어섰는데 평소의 이모부라 분명 시답잖은 농담으로 웃으며 날 맞아주셨을 텐데 웬일인지 이모부는 날카로운 눈을 가려주는 뿔테안경도 끼지 않고 이불 위에 조용히 누워계셨다. 그런 이모부 가슴 위로 청진기를 몇 번 대어보던 의사 선생님은

  "198*년, *월,*일 *시 *분 이**씨가 사망하셨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얼굴 위로 흰 천을 덮어주었다. 볼록하게 거북이 등처럼 솟아난 이모부의 배 위에 덮인 흰 천을 보며 '이모부 배가 왜 저렇게 커졌지? 왜 얼굴에 흰 천을 덮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이모집을 나왔는데 기분이 아주 묘했다. 잠시뒤 골목 안에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이모와 사촌오빠의 흐느낌과 함께 그제야 나도 이모부의 죽음이 실감 났다. 아니 그제야 이모부의 죽음을 깨달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 뒤 치러진 장례식은 이상하게 기억에 남아있지 않고 그저 내 기억 속의 첫 죽음은 그렇게 죽음에 대한 의문과 허무함이라는 감정으로 지금까지 내 마음에 새겨져 있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기로 이미 정해진 것이기에 죽음이란 단어는 정말 허무하다. 이모부처럼 술로 괴로움을 달래다 병들어 죽은 사람도 생전에 해군부대 대령으로 멋지게 사셨던 시아버님도 죽음 앞에서는 동등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죽음이란 게 허무하게 보였다.

 죽음은 동등하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존경받는 삶이 되기도 하고,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는 삶이 되기도 한다. 살아생전에 간첩을 잡고 국가유공자로 현충원에 계신 시아버님의 삶은 훌륭했다. 하지만 아버님이 돌아가신 빈소는 상주가 처음인 아들과 며느리의 미흡한 대처로 썰렁하고 쓸쓸한 공허함만이 맴돌았다. 죄송한 마음에 아버님 사진만 멍하니 바라보다 잠시 눈을 붙이러 방으로 들어갔다.

 장례식장의 비좁고 딱딱한 방구석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기억되는 이 첫 죽음이 삶보단 두렵지 않은 것이길,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삶이 더 두렵고 소중한 것임을 알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멋지게 살아가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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