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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를그리다 Jul 28. 2024

아이들은 뛰어노는 게 최고지!

엄마 어렸을 적엔-6-

 이사 후 아이들의 불평은 화장실뿐만 아니라 놀이터에 놀 것도 없고 밖에 차가 많아서 뛰어놀 수도 없다 것도 있다. 몇 개월 전 이사한 몇십 년 된 낡은 아파트인 우리 집은 그네와 시소가 전부인 모래놀이터에 지하주차장도 없는 그런 곳이다. 실외주차장밖에 없는 데다 노령인구가 대부분의 입주민을 차지하는 동네라 주말에도 외출하는 차가 거의 없는 듯 주차장은 늘 만차다. 그런 연유로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놀지 못하고 주말에 약속이 없거나 외출하지 않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TV나 휴대폰 게임을 허용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미디어 이용이 늘어나게 된 것이다. 미디어란 것이 한 번 시작하면 끊기가 힘들기에 평일엔 하루 30분, 주말엔 하루 1시간으로 시간을 정해두었는데 한 시간이란 것이 생각보다 빨리 지나기에 아이들은 금방 또 심심하다고 노래를 불러대곤 한다. 그렇게 구도시로 이사 온 것에 투정을 하거나, 주말에 놀 것이 없다고 징징댈 때면 휴대폰이나 TV를 보지 않아도 친구들과 하루종일 밖에서 재미있게 뛰어놀았던 그때가 떠오르곤 한다.


 어릴 적 살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은 생각보다 꽤나 길었는데 그곳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거나 여러 팀이 긴 고무줄을 늘어뜨려 고무줄 뛰기를 해도 될 정도의 거리였다. 폭은 2 미터 남 짓으로 내가 살던 안쪽집을 제외하고 골목을 사이에 두고 두 집이 더 마주 보며 있었다. 오른편은 딸 셋, 아들하나의 박 씨 아저씨집, 그리고 왼쪽은 공주네가 살았다.

 공주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으로 별명이 아닌 진짜 이름이 공주였다. 삼십 년도 더 된 기억이란 것이 아무리 선명한들 남의 집 사정까지 정확할 순 없는지라 확실하진 않지만 아들만 4~5명을 낳다가 귀하게 얻은 딸이라 붙인 이름이라 들었다. 공주는 당연하게도 이름으로 인한 놀림을 많이 당했었는데 그 아이는 짙은 눈썹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그것이 동화 속 공주의 얼굴보다는 짱구의 얼굴과 더 겹쳐보이는 것은 기억의 오류일까...아무튼 princess 이미지와 멀었던건 확실하다.

 공주네 집 마당에는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과자를 맘껏 사 먹을 수 없었던 서민집안의 아이인 골목 식구네 아이들에겐 그 무화과 열매도 꽤 맛있는 간식 중 하나였다. 껍질에 입술이 닿으면 입술이 부을지도 모른다는 어른들의 말에 반으로 자른 무화과열매를 벌려 최대한 이로만 조심조심 먹었는데 살짝 달콤했고 물컹한 느낌에 가끔 씹히는 씨앗이 씹는 맛을 더해주었던 과일로 지금으로 치면 푸딩과 같은 간식이 아닐까 싶다. 입술을 닿지 않게 했던 건 복숭아 털 알레르기와 같은 이유였으리라...

 박 씨 아저씨네는 강아지와 고양이를 여럿 키웠었는데 우리 집에서 잠깐 키웠던 흰색 강아지 메리도 박씨네로 보냈었다. 메리가 이가 나기 시작하면서 내 신발과 줄넘기 등을 마구 물어뜯기 시작했고, 손이 많이 간다 느꼈던 엄마는 그 강아지를 박 씨 아저씨네에 줬다고 한다. 박 씨 아저씨네에서 메리가 새끼 낳는 것도 보고, 고양이가 새끼 낳는 것도 보았었는데 그때 동물이 새끼 낳은 직후 많이 예민해져서 절대 근처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개나 고양이의 임신기간이 겨우 2개월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지금처럼 책이 아닌 모든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웠던 거 같다. 그렇게 직접 경험하며 배운 것이었기에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골목에 사는 이웃집들을 지나쳐 골목 어귀로 나가면 앞에 흙모래가 깔린 작은 공터를 지나 시멘트로 포장된 커다란 공터가 나왔다. 그 공터 안쪽에는 군부대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고, 거기에는 항상 초록색 철모를 쓴 군인아저씨 둘, 셋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공터는 말 그대로 탁 트여있는 넓고 비어있는 터로, 포장이 되어있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반질반질 매끈한 시멘트나 아스팔트 바닥이 아닌 흙으로 된 땅 위에 그대로 시멘트만 부어 말린 형태였다. 그래서 바닥에는 자잘한 자갈돌이 튀어나와 있기도 했는데, 뛰다가 넘어지면 튀어나온 돌에 찍혀 무릎에 피가 나기 일쑤였고 심하면 찢어지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화들짝 놀란 부모가 병원에 데려가 꿰매는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빨간약 하나만 바르면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꽤나 선머슴 같이 왈가닥이었던 내 무릎은 멀쩡할 날이 별로 없었고 아직도 그때 생긴 무릎의 상처가 그 시절의 추억처럼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공터엔 그네도, 시소도 없었지만, 그저 확 트인 그 공간 하나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맘껏 자유롭게 뛰어놀았다. 빈 공터와 돌멩이 하나만 있으면 하지 못할 놀이가 없었던 것이다.
 커다랗고 뾰족한 돌하나를 주워 세모와 동그라미를 그리면 오징어달구지(오징어게임)을 할 수 있었고, 작은 돌을 손가락으로 튕겨서 나간 만큼 내 땅이 되는 땅따먹기를 하면 땅부자가 된 느낌에 행복하기도 했다. 또 그 뾰족한 돌로 기다란 선 하나를 긋고 아이 손바닥만 한 넓적한 돌을 주워와 일렬로 세운 뒤 반대쪽 선에는 아이들이 일렬로 서서 세워놓은 비석을 던져 맞추는 비석 치기도 정말 재미있었다. 문구점이나 조그마한 구멍가게 입구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오십 원짜리 검정 고무줄 하나면 몇 시간이고 고무줄 뛰기를 하며 놀기도 했다. 요즘처럼 따로 줄넘기 학원을 간다거나 태권도 학원을 보내어 운동을 시킬 필요 없이 우리는 매일을 그렇게 뛰며, 운동하며 놀았다. 군부대 앞 공터를 놀이터 삼아서 말이다.



 "TV 많이 봤으니까 이제 그만 나가 노는 게 좋지 않을까?"

 "집 앞 놀이터는 크지도 않고, 놀이기구도 없고 같이 놀 친구도 없어."

 나의 말을 들은 둘째 아들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가 없어 놀 수없단 핑계를 또 댄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이들과 함께 걸어서 10분 거리인 공원으로 나섰다. 공원에는 이미 많은 아이들이 그네를 타거나 축구를 하기도 하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어! 태권도 학원친구다!"

 때마침 친구를 발견한 아들은 축구공을 가지고 신나게 친구에게로 달려간다. 친구에게로 뛰어가는 발걸음이 어찌나 경쾌해 보이던지 아이를 보며 흐뭇한 엄마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래. 내가 조금만 부지런 떨면 아이도 이렇게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거였지.'

 아이가 뛰어놀지 않았던 건 우리가 옛날 아파트로 이사해서도, 집 앞에 차들이 많아서도, 놀이터에 그네와 시소밖에 없어서도 아니었다. 주말엔 쉬고 싶다는 내 게으름이 아이가 밖에서 활기차게 뛰어놀 수 있는 생각을 편하게 볼 수 있는 미디어에 주는 관심으로 바꿔버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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