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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를그리다 Jul 07. 2024

엄마도 자유가 필요해!

엄마 어렸을 적엔 -3-

  "당신 이번 생일 선물로 뭐 받고 싶어?"

  "자유!"

  "자유?"

  "응. 나 혼자 1박 2일 동안 여행 가고 싶어. 그게 내가 가장 원하는 생일 선물이야. 당신은 평일에 쉬면서 애들 없이 혼자 있는 시간도 많은데 나는 쉬는 날도 애들하고 보내잖아."

  "생각 좀 해볼게."

 언제나 가족이 함께라는 생각이 강한 데다 아직도 아내 바라기인 남편은 나 없는 1박 2일이란 시간을 어찌 보낼지 벌써부터 고민에 빠진 듯하더니 어렵사리 나만의 여행을 허락해 주었다. 결혼 후 10년 동안 단 하루도 아이 없이 지낸 적이 없었다는 아내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인 나는 심지어 친정의 도움조차 없이 두 아이를 오롯이 혼자 힘으로 키워야 했다. 친정엄마는 본인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드신 상태고, 아버지는 부산에서 아직도 현역으로 일을 하시는 터라 아이를 부탁할 데가 없었다. 때문에 첫째를 낳고 1년, 둘째를 낳고 단 5개월을 쉬었을 뿐 계속 일을 하면서 두 아이 육아까지 함께 했기에 남편에게 당당히 자유를 선물로 부탁했고 그렇게 나는 혼자 1박으로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엄마. 안 가면 안 돼? 왜 우리는 제주도 안 가?"

초등학교 2, 3학년인 두 아이는 아직도 고목나무의 매미처럼 엄마에게 철썩 달라붙어 떼를 쓴다.

 "oo아, 엄마 진짜 너희 낳고 계속 일하고 너희 어디에 맡겨 본 적도 없잖아. 아빠 계시잖아. 엄마 어렸을 때는 어른 없이 형제끼리 셋만 있거나 할머니 댁, 고모 댁에서 지낸 적도 많아."


  어릴 적 나는 종종 이 집, 저 집 친척집에 맡겨졌었다. 엄마는 외할머니댁에서 홀로 자취하던 아빠의 잘생긴 외모에 반해 멋모르는 스무살에 결혼을 했다. 이듬해 바로 첫째인 언니를 낳고 3년 터울로 아들인 둘째도 낳았다. 하지만 우리 집의 장손이자 나보다 세 살 많은 오빠는 생후 1년도 안 돼서 콜레라에 걸려 죽을 뻔했다고 한다. 그때 아들을 살리랴, 어린 딸 돌보랴 하루에도 수십 장씩 쌓이는 천 기저귀 빨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살아야 했던 엄마는 더 이상 아이를 원치 않았다. 하지만 원치 않게 셋째인 내가 생겼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엄마의 삶에서 불청객이 되었던 것이다.

 첫째와 둘째를 초등학교에 보내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엄마는 내가 6살 되던 해에 외할머니 댁에 나를 맡겼다.

 "당분간 할머니 집에서 지내라.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그렇게 아직 엄마 손길과 애정이 고픈 나는 우리 집에서 버스로 30분 남짓 거리의 외할머니 댁에 옷 몇 가지가 전부인 작은 짐가방과 함께 기약 없이 맡겨졌다.

 외할머니는 작은 구멍가게 하나를 운영하셨는데 꼭 필요한 생필품 몇 가지와 과자들, 천장엔 튼튼한 빨랫줄에 아이들 장난감 몇 가지까지 걸어놓고 판매하고 있었다. 당시에 유아원이란 곳이 있었지만 비싼 유아원 근처엔 발도 못 붙인 나는 매일 할머니 집 단칸방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스르르 낮잠에 빠지거나 가게 앞 도로에서 근처 사는 또래 친구와 흙을 만지며 노는 것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꿉꿉한 습기를 품은 벽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곰팡내와 오래된 장롱에서 나는 낡은 나무냄새를 지금도 나는 외할머니 냄새로 기억하고 있다. 무릇 오래된 것과 할머니는 같다는 공식이라도 되는 냥... 그래서 나는 오래된 것이 싫지 않고 아련하기만 한 가 보다.

 "할매, 내 저거 갖고 놀아도 되나?"

 분홍색 플라스틱 컵과 노란색 프라이팬, 숟가락, 포크 등 몇 가지가 들어있는 신상 소꿉놀이를 가리키며 내가 말하자 심심한 손녀가 측은했던 외할머니는 흔쾌히 빨랫줄에 걸려있던 소꿉세트를 꺼내 뜯어주었다. 지금이야 다이소에서 천 원이면 그때 그것과 비슷한 소꿉놀이를 살 수 있지만 중국과 수교를 하지 않았던 그 당시는 소소한 공산품 하나도 결코 싸지 않았다. 새 제품으로 들여와 손님에게 팔아도 얼마 남겨먹지도 못할 비싼 완구를 사랑하는 손녀를 위해 선뜻 꺼내주었던 외할머니의 얼굴은 그렇기에 더욱 그 인자한 미소 그대로 가슴속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새 장난감에 신이 난 6살 꼬맹이는 그 후로도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1년이 넘도록 외할머니 댁에서 그 소꿉놀이 장난감이 다 닳도록,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또 들으며 지냈었다.


 " 너흰 정말 행복한 거 아냐? 엄마는 아무리 바빠도 너희를 엄마 손으로 지금껏 다 키워줬잖아. 이제 제법 컸으니 1박 정도는 엄마 없이 지내는 연습도 해봐."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세 김포공항까지 다 다랐다. 마음이 찡해진 아이는 눈물을 그렁이며

 "엄마, 잘 다녀와."

 공항입구에서 애써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청명한 가을의 한 자락을 놓칠세라 너도 나도 가을을 만끽하러 떠나는 듯 공항 안은 여행객들로 제법 붐비었다. 사람들 틈에 밀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이들과 고작 1박을 떨어지는 데도 이렇게 서로 가슴이 찡하고 애틋하기만 하건만 할머니 집, 고모 집, 이모 집 등으로 나를  보내면서 우리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도 같이 밀려들어왔다.

 "훠이, 훠이."

혼자만의 완벽하고도 즐거운 여행을 위해  마음에 낀 우울한 기분을 파리 쫓듯 겨우 쫓아버리고 10년 만의 자유를 만끽하러 비행기에 올랐다. 이륙 후 창밖으로 보이는 몽실몽실한 구름과 함께 이 시간 나를 방해하는 그 무엇도 없다는 생각에

 '드디어 자유다!!'

하는 기쁨이 두둥실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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