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건빵을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골목안쪽 초록대문 집 한 지붕 다섯 가족! 초록대문 안 주인집을 지나 꺾으면 나오는 첫 번째 집은 이모집, 그냥 친근한 아무나를 부르는 말이 아닌 진짜 우리 엄마의 둘째 언니네 집이었다. 그다음 집은 우리 집, 옆집은 갓 돌 된 아기와 대여섯 살 된 여자아이 둘이 사는 서울말 쓰는 이쁜 이모네 집, 제일 안쪽 집은 배 타는 아저씨네 집이다.
그 각각의 집에는 비바람이나 제대로 가려줄까 싶은 합판으로 만들어진 허술한 문이 우리만의 공간을 가려주고, 구분해 주는 유일한 문이었다. 주인집조차 두툼하긴 해도 손질하다 만 듯한 투박하고 거친 나무 문이었건만 우리 집만은위 쪽이불투명 유리로된 알루미늄재질의 제대로 된 문을 달고 있었다. 이유인즉슨 울아버지가 제법 규모 있는 현관문 제조 회사의 기술자였기때문이다. 이후로도 어떤 집에 이사하든지 간에 현관문은 우리 집이 제일 좋았는데 집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문에서부터 오는 특별함이 내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산 같은 존재였다.
똑똑한 머리에 당시 일류 고등학교였던 동래고등학교를 떡하니 합격하고도 집안 형편 때문에오롯이 공부에 매진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일찍이 스스로 번 돈으로 일과 공부를 병행해야만 했다. 열대여섯 살 때부터 기술을 배우며 현장에서 일한 탓에 까맣게 그을린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 베이고 힘줄이 툭 불거져있다. 그런 아버지의 손은 못 만드는 것이 없는 맥가이버 손이었고, 그 손에는 호리 한 체격에 잘생긴 얼굴로 26살에 일찌감치 결혼을 해 중학생이 된 큰 딸, 두 살 아래의 아들, 그리고 막내인 나, 이렇게 자식을 셋이나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감이 강하게 붙들려 있었다.
맥가이버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와 달아 두었던 문을 열면 일명 부뚜막이라 불리는 한 평 남짓의 부엌 겸 씻을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한여름 등목정도만 겨우 가능했던 한 평남짓의 부뚜막엔 신발장과 연탄보일러, 그 위에 놓인 낡은 곤로 한 개가 겨우 자리 잡고 있었다. 좁디좁은그곳에서 요리도 하고, 머리도 감고, 목욕탕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설거지까지 해야 한다.
신발장 옆으로 난 어른 무릎높이의 돌계단 위에 신을 벗고 들어가면 안방과 작은 방이 나란히 보인다. 그 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바로 부뚜막 위의 다락방이었다. 아이가 앉아야만 겨우 허리를 펼 수 있는 낮은 천장에 아이 세명 정도가 딱 붙어야만 겨우 누울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 덕에 더 아늑하고 아지트 같은 공간이 되어주었다. 당시 일본의 세계명작만화 빨강머리 앤이 한참 유행이었는데 그 다락방에 올라갈 때면 내가 빨강머리 앤이라도 된 듯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다른 점이라면 초록색 지붕이 아닌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이오. 푸르른 녹음과 수줍게 핀 접시꽃이 있는 정원을 지나 다그닥 소리를 내며 달리는 마차대신 거친 한숨을 토하듯 부르릉 매연을 뿜으며 달리는 초록색 장갑차가 창문너머의 풍경이라는 것이지만...
빨강머리 앤 캡쳐
비록 창문너머 보이는 풍경이 힘들고 지루한 훈련을 견뎌내야 할 암울한 표정의 청년이 득실 한 군부대일지라도 그러한 이유로 특별하기도 했는데 창문너머 몰래 군인들의 훈련을 훔쳐볼 때면 뭔가 비밀스러운 아지트, 요새의 느낌을 더 해주었기 때문이다. 9살 소녀에게 국군의 날 위문편지를 쓸 때나 생각해 볼 수 있던 군인아저씨를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은 꽤나 특별한 일이었다. 때문에 하교 후나 주말에 할 일이 없을 땐 늘 다락방에 올라가 부대를 예의주시하며 요새에 숨어있기라도 한 듯 전쟁놀이를 하기도 했고 식사 때가 돼서 군인들이 우르르 몰려올 때면
"아저씨 건빵 주세요~"
라고 외쳐대기도 했다. 건빵을 언제 어떻게 처음 군인 아저씨들이 주기 시작한 건진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 처음부터 나는 그 집에 살 때 늘 군인아저씨들에게 건빵을 얻곤 했다. 담너머바로 앞이 식품창고와식당이었기에매 식사시간마다 지나가는 군인을 많이 볼 수 있었고, 그렇게 지나가는 군인아저씨를 부르기 가장 적합한 장소가 다락방이기도 했다.
처음엔 지나가는 군인아저씨마다 마구 불러 세웠는데 가만 보니 누군가는 건빵을 잘 주고, 누군가는 내 목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한쪽 팔 옆에 그려진 막대가 많은 아저씨일수록 건빵을 쉽게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한참 후에야 그것이 군대의 계급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그때 운 좋게 높은 계급의 아저씨를 불러 세우면 누런 종이포장지 안에 달콤한 별사탕이 든 건빵 몇봉지를 받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가끔 튀긴 건빵에 설탕을 뿌려 직접 제조한 건빵튀김을 주기도 했는데 그땐 건빵 튀김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간식 중 하나였다.
군인아저씨가 건빵을 가지러 창고에 가면 그동안 나는 최대한의 순발력을 발휘해 문밖으로 뛰어가야 했는데 담을 넘어 날아오는 건빵을 잡기 위해 아이들 간의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장성하거나 어린 아기인 집들을 제외하고 늘 나와 배 타는 아저씨네 넷째인 쩡이언니, 막내인 영아언니 우리 셋이 그 전쟁의 주역이다. 나는 주로 두 자매사이에 홀로 외롭게 전쟁을 치러야 하거나 가끔 골목 바깥 친구들이 놀러 와 지원군이 되어줄 때에만 정정당당한 싸움을 치를 수 있었다.
우리는 건빵뿐만 아니라 명절엔 생선 같은 것을 얻기도 했다. 꽁꽁 언 바닷물에 추워서 단체로 모여있다가 얼어붙은 듯한 생선무더기를 그대로 네모지게 뚝 잘라낸 것 같은 생선얼음덩어리를 받으면 그날은 정말 제대로 명절 기분을 내며 생선을 원 없이 먹었다.
학교에선 아직 반공사상을 배우던 그때, 총칼을 앞세워 나라를 독재하던 군사정부는 물러가고 내 이웃 군인아저씨가 나눠준 건빵 몇봉지에 환해진 아이들 얼굴처럼 우리나라에도 첫 민주주의 대통령이 탄생하며 민주주의 꽃이 활짝 피었다.
집에 누룽지며 바나나며 먹을 게 잔뜩 있는데도
"엄마, 배고파. 집에 먹을 게 없어."
라고 말할 땐 건빵 먹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이때의 이야기를 하면 남편은
"무슨 6.25 전쟁 난민의 기브미 초콜릿도 아니고, 건빵 주세요라니... 진짜야? 당신 나이 속였지?"
라며 믿지못 할 얼굴로 말하곤 했다. 그럴 때 난 오히려 남편이 그 시절을 제대로 모르는 서울 촌놈은 아닌가 싶다.
"엄마, 근데 튀긴 건빵이 진짜 맛있어?"
얼마 전 집 앞 편의점에 갔다가 매대의 한구석에서 튀김건빵 봉지를발견하고는 반가웠던 기억이 나서 내친김에 아이와사러 나갔다.
"와! 엄마. 맛있어.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더니...
건빵튀김 진짜 맛있네."
어디서 들은 말은 있었는지 우스갯소리를 하며 튀김 건빵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을 보니 앞으론 아이들과 함께 추억할 내 어린 시절이 생겼음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