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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Oct 18. 2023

시절인연

그리운 친구, 숲에게

보고싶은 친구, 숲에게 

    

그리운 내 친구 숲,   

  

가을이 온 서울은 거리마다 오렌지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어.

나는 그 한가운데에서 온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며 살고 있다.


어떻게 지내니?

여고 시절을 생각하면 항상 생각나던 내 친구들.

다정했던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만나지도 못하는 걸까.

     

숲,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서,

너는 오십 명 친구들 중에 누구보다 빛나던 친구였어.


몸이 안 좋아 한 해를 휴학하고 왔으니 당연히 언니인데도,

그냥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지.


이름이 외자인 것도 멋있었는데, 숲이라고 하니,

듣는 순간 청량감이 퍼져왔다.     


공부만 공부만 그렇게 열심히 하는 널 보며

진짜 독하다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언젠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교실을 순회하시는 총각 선생님에게

너는 당돌하게도 이런 질문을 했었어.

   

‘선생님,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이런 철학적인 생각을 열여덟 나이 그때 벌써 했다니,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은데 말이야.


나는 너의 그런 진지함이 좋았고,

그래서 내 친구 숲이 더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숲,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입시를 끝내고 우리 학교 근처 어느 분식집에 갔었어.


A랑, B랑 너랑 나 이렇게 넷이,

맨 아래 통에 따뜻한 물을 넣어

보온이 돼던 도시락을 들고 가서

쫄면이랑 떡볶이 시켜놓고 밥 먹었던 거.


B가 그 보온도시락 물통에 집에 있던 양주를 넣어와

우리 보리차인 척하며 넷이서 사이좋게 따뜻한 독주를 돌아가며 마셨던 일.

그게 나의 최초 음주였다.


우린 제법 취해서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데,

열심히 공부했던 것보다

이게 고등학교 통틀어 젤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남아있어.

     

대학을 가서 A가 우리 중에 남자친구를 처음 사귀었고

우린 좋아라 손뼉을 치며 기뻐해 주었지.


A가 남자친구 소개해 준다고 어느 봄밤, 종로에서 다들 만났었는데.

우리들 사이의 이별 드라마는 이때부터 쓰이고 있었나 봐.


A의 남자친구가 B랑 눈이 맞아 막장드라마가 시작되었지.

A도 그놈이 내 친구 B를 좋아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니.


첫사랑 남자친구를 가장 친한 여고 동창에게 뺏겼으니

용서될 리가 없지.

그놈도, 여고 시절 친구도.

그렇게 우리 넷은 같이 만나기엔 힘든 사이가 되어버렸다.  

    

후에 B가 그놈이랑 결혼한 소식은 들었지만

여고 동창들은 아무도 결혼식에 초대받질 못했고.

    

숲,


마지막으로 너와 연락을 한 건 대학원에 진학을 했다는 소식이었고,

거기서 만난 연하의 남자와 만나 결혼을 했다는 거였어.  

    

숲,


불교에서는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고 하더라.

‘시절 인연’이라나.


모든 사물의 현상은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이라는데 나에겐 어렵다.


만나게 될 인연이면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맺어지고,

떠나야 할 인연은 붙들고 싶어서 발버둥 치며 노력해도

헤어지게 된다는 내게는 다소 회의적인 개념으로 다가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니까.


인연의 시작과 끝은 사람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자연의 섭리대로 따르라는 거잖아. 불공평해.

  

숲,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언젠가 또, 우리 시절인연이 닿으면

자연스럽게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그날을 기다린다.

그동안은 더 성숙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남아있을게.

늘 건강하고, 그때처럼 너도 아름다운 사람이길.


어느 가을이 아름다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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