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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Nov 01. 2023

나의 19호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성찰을 한다. 사춘기 때였을 수도 있고, 힘든 일을 겪고 난 후일 수도 있다. 또는 매일 이러한 철학적인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도 있으리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레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라는 단편소설을 읽고서 ‘나의 19호실은 어디인가’라는 물음표를 던진다.

 

세상에 부러울 것 없이 평범 이상의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수전과 매슈.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갖춘 듯 하지만 원래 불행은 살며시 스며드는 법. 수전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행복하지는 않았나 보다. 돈 잘 벌어오는 남편과 번듯한 집, 잘 커가는 아이들이 있음에도 무언가 허전하고 아쉬움, 답답함. 언젠가 우리 모두가 느껴본 그런 상실감 같은 것. 수전은 자기만의 공간에서 온전히 자신으로 머무르길 원한다.      


타인으로부터는 채우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세계에 수전은 늘 만족하지 못했다. 수전은 허름하고 낡은 모텔숙소의 19호실을 찾았다. 오전 10시부터 6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그녀 자신이 되는 곳, 수전은 집보다 19호실을 더 그녀의 것 같이 느꼈다. 수전은 고독의 시간을 점점 더 원하면서 일주일에 5일씩 집을 비우고 19호실에 머무르게 된다. 그곳에서 온전히 평온함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그러나 그런 평온함을 느낀 것도 잠시, 모텔방을 출입하는 수전을 알게 된 남편 매슈는 바람이 났냐고 물어본다. 매슈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기에 당연한 질문이었다. 왜냐면 자신의 경험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것이 사람이므로. 수전은 남편의 생각이 맞다고 거짓말을 해버린다. 남편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거짓말을 하는 수전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또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은 그녀의 마음 또한 이해가 된다. 수전은 힘들게 자신만의 19호실을 찾았고, 껍데기로서가 아닌 내면의 행복감까지 느꼈다. 하지만 남편이 수전의 비밀을 알고 난 후, 19호실은 더 이상 수전이 자아를 찾아가는 곳이 되지 못했다. 수전은 이곳에서 자살하고 만다.     


슬픈 결말이다. 책을 덮고 난 후 나라도 그랬을까 싶은 생각에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보통의 소설은 살만하니 남편이 바람이 났더라 이거나, 억대의 보험금을 노려서 라던지 뭐 이런 자극적인 요소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19호실의 이야기는 너무나 평범한 여자로부터 시작한다. 수전은 아이들을 키우고 난 후, 외부의 존재로부터 규정지어지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녀는 스스로가 온전히 자신의 존재를 찾고 싶어 노력할 때 오히려 오해당하고 부정당하였다. 19호실은 진정 그녀에게 필요했던 공간이었는데 말이다.     

 

한때 나에게도 19호실은 있었다. 아파트 꼭대기 층에 산 적이 있다. 다락방이 있던 곳. 나에게는 펜트하우스였다.  

   

남편은 그 아파트 다락방의 천정을 높이고 리모델링하여 만든 공간에 피아노를 놓아주었고 아담한 서재와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밀실까지 만들어 주었다. 볼품없던 다락방이 훌륭한 모양새를 갖춘 힐링의 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바닥에는 온열이 가능하도록 난방을 설치해서 추운 겨울에도 좋았다.      


일상생활은 거실과 침실이 있는 아래층에서 하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가족과는 분리되는 다락이 있어 온전한 쉼을 할 수 있었다. 책상이 있었고, 컴퓨터가 있어 내가 놀 수 있는 여건이 모두 갖춰져 있었다.     


다락방 서재의 한쪽 벽을 차지한 통창문을 열고 나가면 옥상으로 연결되었고 하늘을 더 가깝게 마주 볼 수 있었다. 손을 뻗으면 지나가던 구름이 악수해 줄 것 같은 하늘 아래 다락방이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옥상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소주를 마시는 상상을 하며 그 집을 샀는데, 화재 위험 때문에 그건 못 해봤다. 눈이 오면 아이들은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창문을 열고 나가 15층 옥상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아빠와 눈싸움을 했다.     

 

나는 그 다락방 창으로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커피를 마시고, 한여름의 소나기를 보았으며 노을 지는 가을 해를 보았고, 눈 내리는 추운 겨울의 사계절을 만났다.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고 지칠 때, 남편이랑 가끔 다투거나 서운할 때, 친정 일로 머리가 아플 때, 잘 살고 있는 건가 삶의 방향을 잃은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여지없이 그 공간에 앉아 자연을 보고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가끔 글을 썼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가진 유일한 공간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같이 있지만 또, 따로 나 스스로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생각의 정리를 할 수 있었고 나 다워질 수 있는, 무엇을 해도 안정감이 있던 곳이었다. 어릴 적 오 형제가 바글바글 모여 살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19호실에 대한 그리움으로 더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훌륭한 공간이 있어도, 3, 40대에는 사실 아이들을 키우고, 경제활동을 하느라 나의 존재 따위는 잊고 살았다. 오히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와 같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규정지어지는 나의 존재 역할에 더 충실했다. 그 역할만으로도 버거워서 겨우 하루하루를 버티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가끔은 나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는 마음이 들 때면 그 다락방에서 쉼을 얻곤 했다.

      

"힘과 능력은 아직 한창이지만 아이들이 다 자라서 더 이상 온 힘을 쏟을 곳이 없어진 쉰 살의 여자들"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을 건너가는 존재가 된다. 수전의 비극적인 운명은 여자이기 때문에 비롯된 측면도 분명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자신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종속된 객체로 부유함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가 되었고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나의 19호실이 되어주었던 다락방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오히려 지금 이 글도 식탁에서 쓰고 있다.


현실은 여기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19호실이다. 부엌에서 아들이 지나가다 식탁에 앉아 컴을 보고 있는 내 앞자리에 앉아 헤어진 여자친구 이야기를 한다. 나는 즉각 하던 일을 덮고 상담자가 되어  엄마 역할에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남편이 맞은편에 앉으면 19호실은 폐쇄되고 동네 맛집이 된다. 그러나 나는 부지런히 나의 19호실을 찾아다닌다. 그곳은 가끔 서울숲역 스타벅스 카페이기도 하고, 산책하는 한강변일 때도 있다. 요즘은 브런치가 나의 디지털 19호실이 되었다. 그리고 나답게 살고 싶으니 존중해 달라고 끊임없이 가족들에게 항변하며 이제 당신들의 누구라는 자아이기 이전에 내 이름을 찾겠다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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