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에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연경은 나이 들어갈수록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사실이 자신을 죄여오듯 압박감이 느껴지면서 우울해진다.
'만일 새해 초에 크리스마스가 있었다면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연경은 내일 친구들과의 모임에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하며 이런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엄마, 엄마가 몇 년 전에 나 들고 다니라고 준 명품백 있잖아, 샤*에서 나온 거 그거. 나 친구들 모임에 그거 들고 가도 돼?”
“음, 그 검은색 큰 가방 말이지? 그거 내가 너 그냥 하라고 줬잖아. 너 해, 그거 네가 드니까 더 예쁘더라.”
엄마는 늘 쿨하다. 별스럽지 않게 얘기해 주지만 늘 칭찬하는 엄마의 언어습관은 진짜 배워야 한다. 내일 친구들 앞에서 엄마에게 물려받은 거긴 하지만 명품백을 들고 가 으쓱할 생각에 연경은 벌써 콧노래가 나온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을 만나니 학교 다닐 때와는 뭔가가 또 다르다. 사귀는 남자친구부터 하다못해 들고 다니는 가방까지 비교가 된다.
“찾았다. 엄마, 여기 있네.”
옷장 속에 가방 색이 바래지 않도록 곱게 천을 씌우고 형태가 무너지지 않고 가죽이 망가지지 않도록 종이솜을 잔뜩 먹은 명품 가방이 짜잔 하고 나왔다.
“그래, 가방색이 검정이니 밝은 색 코트도 예쁘겠다.”
딸이 예뻐 보이는 게 좋은지 엄마는 옷까지 이것저것 권하고 있다.
“근데, 엄마 이 가방 진짜 오래되긴 했다. 올 겨울까지만 들고 중고시장에 내야 할 것 같아.”
연경이 대학생이 되면서 들기 시작했으니 햇수로는 7년 정도 들었나 보다. 하지만 그전에 처음 우리나라에 이 가방이 들어올 때 아빠가 엄마한테 선물 했다고 들었으니 이 가방의 나이는 연경의 나이 정도 아니면 더 되었을 수도. 여전히 들고 다닐만한 거 보면 괜히 명품이 아닌 것 같다. 이름값 한다 싶었다.
엄마의 오래된 귀한 물건인데 허당인 딸에게 선뜻 들고 가라고 쿨하게 허락해 준 엄마가 고맙다.
“엄마, 이젠 이거 우리 올 겨울까지만 사용하고 당근마켓이든 어디 중고 마켓에 싸게 팔자. 내가 월급 타면 할부로 좋은 거 사줄게.”
“아이고 얘, 말만 들어도 기쁘다. 너나 좋은 거 사서 들고 다녀. 엄만 괜찮아. 들고 어디 나갈 데도 없어. 그리고 그 가방은 그냥 버려. 중고마켓은 무슨.”
“에이, 그러지 말고, 기회가 자주 오는 게 아니야, 어디 브랜드가 좋아? 엄마, 하나 사서 또 우리 같이 들면 되잖아.”
“그리고 엄마, 이렇게 쌩쌩하구먼 버리긴 왜 버려, 나가서 땅을 파봐요 백 원이 나오남. 이건 아빠가 맨날 하는 소리잖어.”
아이처럼 연경이 아빠 흉내를 내며 웃는다. 철없는 딸의 수다에 살짝 웃음 지었지만 엄마의 표정은 잊고 있었던 아픈 상처가 기억난 듯 어두워졌다.
“실은 엄만 이 가방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어. 아빠가 사 준거라 그냥 들고 다녔지”
“아이, 왜 엄마, 패션의 완성은 이 가방이야, 엄마같이 우아해 보이는 여자가 이 가방까지 딱 들면 얼마나 멋져 보이는지 알아?”
아빠가 첫 결혼기념일에 월급을 아껴서 사 준 가방이라며 자랑하던 것을 연경이 커가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좋아하지 않았다고 이제야 고해성사를 하다니. 늘 예쁘게 말하는 엄마답지 않다. 그리고 엄마의 이 가방을 들 때마다 왠지 연경은 모녀 사이를 친밀하게 해주는 매개체인 것 같아 내심 뿌듯했었다. 엄마의 얼굴에 지난 일이라도 떠올랐는지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예민한 연경이 놓칠 리가 없다.
“다 지난 얘기지만, 사실은 이 가방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
“무슨 기억, 무슨 추억인데? 아빠랑 뭐 어디 좋은 데라도 여행 간 거야? 이 가방 들고?”
연경은 엄마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보채듯이, 귤을 까서 엄마 입에 넣어주며 어린 시절 엄마가 책 읽어주셨을 때처럼 착 들러붙어 앉았다.
“네가 아주 어렸을 적에, 넌 기억도 안 날 거야.”
“나 머리 엄청 좋잖아. 다 생각나 다, 그니까 얘기해 봐. 언제 적 얘기길래 이렇게 뜸을 들인담.”
“응, 그치 우리 딸이 머리는 좋지 하하. 흠, 근데 나도 잘 기억도 안 나네. 아주 오래전 이맘때쯤이었나 봐. 눈이 아주 많이 왔거든, 맞아 크리스마스 이브였나봐.”
살짝 눈을 감는 엄마의 얼굴은 희고 눈가엔 예쁘게 잔주름이 앉았다. 고운 머릿결에 눈처럼 하얀 새치도 언뜻언뜻 보였다.
“해가 지고 있었는데 말이야, 전화벨이 아주 시끄럽게 울렸어. 아 맞다. 며칠 뒤가 할아버지 제사라 연경이는 할머니 댁에 미리 맡겨놓아서 없었고 집에는 동생 연우만 애기여서 코 자고 있었네.”
“아빠가 전화한 거야?”
“아니, 아주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였어. 김진우 씨 댁 맞냐고.”
“아빠 이름이잖아, 기분 나쁘게 왜 우리 아빠를 찾아?”
“그러게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가 순진해서 아무것도 몰랐어.”
“아우 엄마 빨리빨리 얘기해 줘 그래서, 어떻게 됐어?”
“당신이 김진우 씨 와이프냐고 다짜고짜 묻더라, 휴.”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