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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Dec 11. 2023

크리스마스의 비밀 2

1편에 이어집니다.


“김진우 씨 아내분이시죠?”


“네 맞는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저는 오승주라고 해요. 진우 씨가 얘기했을 리는 없을 테고....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 ”   


“(아니, 다짜고짜 전화해서, 지금 뭐라는 거지?) 음.. 그런데 누구신데, 전화하셔서 갑자기 만나자고 하는 건지, 저는 그쪽을 상대할 이유가 없는데욧.”  


"진우 씨랑 사이에 관해 할 말이 있어요..."


 '그리고 뭐 진우 씨? 내 남편을 그렇게 부르다니.'

 

수정은 쿵쿵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상대 들으라는 듯 전화를 아주 거칠게 끊었다. 수정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당당하게 남의 집에 전화를 해서 남편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그 와이프를 만나자고 하는지. 이런 여자의 뇌 구조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건지 당장에라도 뛰어가서 파 헤쳐보고 싶었다. 그러나 정신을 챙기자는 생각이 먼저 들자 수정은 그 와중에도 낼모레가 시아버지 기일이며 남편은 출장 중이고 어린 딸은 제사 때문에 할머니 집에 먼저 보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받지 않으면 마치 밤새 울릴 듯이 벨은 울어대었다. 덩달아 수정의 심장도 벌렁거렸다. 머릿속으로는 누구냐며 한바탕 소리질러 주고 싶은데 입에서 밖으로 튀어나오질 않았다. 버벅거리고 당황하며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이, 아까 대화 마지막엔 또 높임말을 한 것 같아 스스로가 한심했다.     


“...여보세요?”


“전화로 실례를 범하네요. 끊지 마시고..., 저는 오승주라고 해요. 남편이신 김진우 님, 잘 알고 있어요. 드릴 말씀이 있으니 한 번만 만나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수정은 언젠가 본 막장드라마의 스토리와 여태껏 읽어본 모든 연애소설의 전개가 그러하듯 이 여자는 분명 남편의 숨겨둔 여자친구 또는 애인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어디 강남의 술집 여자나 되겠지 생각하면서도 그 누구도 아닌 아이들의 아빠가 그럴 리가 없다고 일말의 희망을 생각했다. 아니 남편을 믿고 싶었다. 적어도 세상 다른 남자들은 다 눈이 돌아가도 내 남자만은 나만 바라보고 살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당돌하기 짝이 없는 어떤 여자가 남편을 너무 잘 알고 있다며 아내인 수정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이제 몇 시간 후에 이 여자를 만나 어떤 삼류 싸구리 영화의 한 장면을 찍게 될지 수정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적어도 수정이 찍고 싶은 인생 영화의 장르는 이런 게 아니었단 말이다.   


“기상청은 오늘과 내일 아침까지 전국에 한파 특보가 발효된 가운데 바람도 강하게 불어 체감온도는 더욱 낮아질 것으로 밝혔습니다. 기압골의 영향으로 저녁부터 전국에 더 많은 눈이 내리겠고 특히 수도권 지역은 외출을 삼가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올해는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것으로 전망되어집니다.”


TV에서 역대급 추위를 알리는 기상청의 전국일기예보가 저녁 뉴스를 통해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연경이는 친가에 있지만 어린 연우를 두고 외출할 수는 없어 여동생을 급히 불러 몇 시간만 연우를 부탁했다. 투덜대면서도, 언니가 급한 일이라니 금방 달려와 주겠다고 하는 혈육이 고마웠다.    


집 가까운 카페는 아는 이웃 아줌마들이라도 만날까 봐 수정은  정거장 떨어진 곳에 약속을 잡았다. 시답잖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이 와중에 옷차림이 신경 쓰였다. 옷장을 열어 휙 둘러보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출산하고 나서 바뀐 몸매에 맞는 옷이 통 없다. 그제야 수정은 거울을 보며 자신의 비참해진 현실을 마주 보았다. 거기엔 현실의 수정이 서 있었는데 알고 있던 자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은 오승주인지 뭔지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 했다.

안에는 대충 걸치고 캐러멜색 긴 코트를 꺼내 입었다. 자신의 체형을 커버하기에 딱이었다. 그리고 쉬워 보이면 안 되지 싶어 남편이 큰맘 먹고 선물해 준 샤* 명품 가방을 꺼내 들었다. 이 가방이 이 순간에 이렇게 쓰일까 싶었으나 왜인지 이 가방을 꼭 들고 가 절대 기죽지 않으리라 수정은 생각했다.


수정은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오승주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남편의 예상치 않은 여자로부터 전화가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살아오면서 이런 만남을 하게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거실 구석에 낼모레 시아버지 기일에 들고 갈 밀주가 보였다. 수정은 술이 센 것도 아니었지만 속상한 마음에 한 병을 물 마시듯 벌컥벌컥 쉬지 않고 마셨다. 독한 술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며  독기운이 퍼지듯 번져갔다. 한 병을 쭈욱 들이키고 나니 새삼 몸이 뜨거워졌다. 없던 용기가 샘솟았다.


기상청의 예보대로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수도권은 바깥출입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새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져 캐러멜색 롱코트의 아랫단이 눈에 파 묻혔다. 코트를 입고 신발까지 제일 아끼던 발목부츠를 꺼내 신었다. 눈길에 나서니 발은 시리고 동상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렇게 관리하면 안 되는 캐시미어인데, 오승주 그 여자 때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려했으나 머릿속이 복잡했던 수정은 추운 거리를 내리 걸었다.  겨울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수정의 귓볼을 지나쳐갔다. 바람소리가 먼데서부터  달려와 수정의 마음을 밟고는 도망쳤다.


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크리스마스이브인 것이 실감 났다. 카페는 온통 빨강과 초록의 절묘한 조화와 성냥팔이 소녀의 가난과 추위마저도 다 녹여줄 듯 했다. 따뜻한 불빛들이 수정을 맞이했다. 그리고 카페 구석 자리에 오승주 같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저 여자구나.' 수정은 감이 왔다.


수정의 상상으로는 짙은 눈화장과 빨간 립스틱을 하고, 컬이 아주 강한 펌을 한 다리를 한쪽으로 섹시하게 꼬고 있으면서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묘하게 싸구리티 나는 여자가 수정을 봐야 하는데 이게 예상을 뒤집는 그런 여인이었다.


긴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이런 날씨에도 아주 차분했으며, 고요한 눈망울은 슬픔까지 어려있었다. 창백한 피부는 추운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산소만 먹고살아 그렇게 맑은 건지, 몸매도 관리를 잘해 아주 탄력 있고 건강해 보였다.


수정은 이 눈 오는 날 바람을 가르며 거추장스럽게 이렇게 롱코트에 이런 큰 가방까지 들고 온 거냐 자신을 원망했다. 수정은 오승주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삼자대면을 하듯 옆자리에 샤*가방을 앉혀두고 오승주를 마주 보고 앉았다.     


"저기... 갑작스러운 전화에 당황하셨을 텐데 나와 주셔서 감사해요."


첫 대화에 어울리지 않는 인사를 오승주가 건넸다. 추위에 걸어오느라 몸도 얼어붙었고, 이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롱코트와 발도 시리고 정신없었던 수정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오랜만에 들고 온 샤*가방을 보며 후회만 가득했다. 오승주에게 보란 듯이 들고 왔는데 수정의 비참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빛나는 가방이 수정을 잔뜩 비웃으며 노려보고 있었다.  


술기운인지 수정은 절대 어리버리해 보이면 안 돼, 그럼 안되지 암, 몇 번을 되뇌며 꼿꼿하게 앉았다.

오승주는 기다리며 미리 시킨 따뜻한 카모마일 티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으며 어렵게 이야길 시작했다.


"어쩌면 미리 짐작하셨겠지만..."

"진우 씨가 캐나다 법인 설립차 작년에 온타리오에 왔을 때 저희 처음 만났어요. 진우 씨 회사에서 법인설립하는데 불어며 영어가 능통한 가이드를 구한다고 해서 자원했다가 도와주게 되면서.."


"아니, 그럼 작년부터 쭈욱 알고 지냈단 말인가요?"


수정은 생각해 보니 작년에 연우를 임신했을 때, 남편이 법인설립차 캐나다 토론토로 3개월 갔었던 게 생각났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춥고, 힘들고, 배고프고, 외롭다더니, 점차 전화도 뜸해져서 나름 잘 적응하고, 또 회사일로 바쁘다고만 생각했었다.

 

"사실, 진우 씨가 너무 곧은 성격인거 잘 아시잖아요. 깍듯하게 매너 있고, 일처리 빈틈없고, 친절하시고, 무엇보다 능력있고, 저한테도 처음에는 업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저 혼자 참 멋있는 남자구나 생각하고 혼자만의 감정이었고요."


수정은 듣고 있자니 이게 술기운 때문인지 자꾸만 열이 뻗쳐 올랐다. 이 여자의 사랑타령을 듣고만 있어야 하는건지 상황이 답답했다.


"그래서, 지금 저한테 전화해서 이러는 이유가 뭐죠? 도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요?"


"저, 저는 원하는 건 없어요. 잘 지내던 진우 씨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고, 결혼을 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저 혼자서 시작했다가, 어느 날 이메일 한통으로 잠수이별을 당한 거죠."


오승주가 말했던 '잘 지내오다가'에 수정은 딱 꽂혔다. 아이들 키우느라 바보가 되어버렸구나 싶으면서도 수정은 소심한 남편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하고도 주변에서 늘 예의 바르다, 동안이다, 수정 씨는 복도 많다는 둥, 모두에게 그렇게 친절한 남자가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냐며 수정을 부러워했었다. 그게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가족도 없 캐나다에 일하러 간 남자가 일만 하면 되는데, 일하던 중에 젊고 예쁜 여자를 만났다. 능력도 있고, 차분한 여자를.

매일 입는 늘어진 체육복처럼 편하기만 한 아내에게는 더이상 느낄 수 없는 이성의 설렘을 진우도 오랜만에 느꼈을 테다. 그도 남자니까.


오승주를 마주하고 앉아보니 수정도 알 것 같았다.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던 남편진우의 이상형이 어쩌면 이런 여자일 수도 있겠구나. 순간 수정은 자신의 비참함에 눈물이 또르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잘 나가던 공부는 왜 때려치고 애만 대책없이 둘을 나은 건지. 몸은 왜 빨리 회복이 안되서 애 낳으면 금새 빠진다던 살은 아직도 떠나질 않는건지.


"제가 너무 순진했어요. 진우 씨와 법인설립에 관한 일이 거의 마무리될 즈음 수고했다며 술자리가 있었거든요. 그때 제 마음을 표현했는데, 거절도 인정도 아닌 모호한 표정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어요, 진우씨가."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캐나다 어디든 둘러보고 싶다는 진우 씨의 바람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을 갔었어요."


수정은 언젠가 진우가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기야, 여기 나이아가라폭포 진짜 멋있어. 아 나이아가라는 미국보다는 진짜 캐나다 쪽이 훨씬 멋진거 같애. 담에 연경이랑 연우랑 크면 꼭 데리고 가족여행 가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사진 속에는 진우 혼자였는데, 찍어준 사람이 누구였을까 수정은 왜 궁금하지조차 않았는지 무딘 자신을 원망했다.


나이아가라로 여행을 하는 동안 오승주는 진우가 자신이 꿈꾸어왔던 남자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3일 동안 그렇게 뜨겁게 안아주며  사랑해, 사랑해를 말해주던 남자가 귀국을 하고는 연락이 뜸해졌고, 어느 날 이메일을 보내왔다는 거였다.


'사실은 결혼을 했고, 너만큼 사랑하지는 않지만 책임을 져야 하는 고마운 여자가 있고 낼모레면 두 아이의 아빠가 될 것이라고. 그러니 이제 연락하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라고. 미안하다고..'


'놀고들 있네.'


수정은 콧방귀를 뀌어야 하는데, 오승주의 눈물을 보니 어떤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오승주는 전화를 해도 받질 않는 남편을 만나고자 대학원도 휴학을 하고, 사랑을 찾아 한국으로 왔으며 회사에 전화해 집전화번호를 알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어쩌면 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순진한 생각으로 전화를 무작정 했다고 했다.


'나에게 아내는 전우 같은 존재야. 전우애란 말 알지? 전쟁터에선 전우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때도 있어. 이성적인 끌림보다는 그런 생사를 같이 하는 전우 같은.'


진우가 그런 말을 이메일에 썼다고 했다. 그래서 오승주는 어쩌면 진우 씨가 전우보다는 사랑을 택해서 자신에게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남편진우가 '여보 고마워'란 말은 자주 했었는데, '여보 사랑해'라는 말을 한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아 수정은 쓸쓸했다.


'나는 그의 전우였구나...'


그렇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에도 카페 창 너머에는 기상청의 예보대로 크리스마스이브의 눈이 한참 내렸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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