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약이다. 지나고 보면 다 잊힌다. 수정은 이런 위로의 말들이 수동적이라 참 싫어했었다.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뜻 아닌가.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자신의 삶을, 사랑을 선택해 온 수정에게 그런 가만히 있으라는 투의 말은 위로가 되질 않았다. 그러나 지나고보니 다행이었다. 생각이 많은 날들이 지나고, 믿음에 금이 간채로 등돌리며 잠을 잔 날들이 지나갔다. 며칠은 그렇게 흐리고 비가 오다가 또 어떤 날은 해가 나기도 한 인생의 날들이 몇 번 반복되니 아이들이 자라갔다. 진우를 붙들고 끝을 볼때까지 싸우고 따지고 들수도 있었다. 그것은 가정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아슬아슬한 끝을 예측하고 해야 하는 싸움이었기에 선뜻 그러질 못했다. 수정의 우울이 더해 갈수록 진우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어느 엄마에게나 생기는 산후우울증, 육아우울증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더 잘해주려고 애썼다. 그는 여린 심성이었고 자신의 실수를 누구보다 잘알고 있었다.
수정은 마음 한켠에 그래 평생 그렇게 죄책감을 갖고 가족에게 충성하며 살아봐 라는 보복심리도 있었다
“미쳤네, 엄마. 어떻게 그렇게 차분할 수 있어?”
“아빠는 여직 그 여자 만난 거 몰라? 왜 말 안 했어?”
“아빤 몰라, 뒤에 다시 캐나다 가기 전에 둘이 만났는지, 하지만 엄마는 아빠를 믿어. 캐나다 다녀온 후 조금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뭔가 단호한 모습이 있었어. 지금 생각하니 그게 우리 모두를 지키기 위해 아빠도 스스로 노력한 것 같기도 하고."
"오승주가 그냥 이상한 여자였으면 오히려 엄마도 대하기가 편했을 텐데, 그냥 평범하고 세상모르는 예쁜 여자였어. 너무 차분하기도 했고."
엄마는 잠시 숨을 골랐다. 더 이상 오승주 그녀에게서 무슨 얘길 들었는지 엄마는 얘기해 주진 않았다. 연경은 그저 캐러멜색 엄마의 코트와 샤*백과 초라하게 앉아 있었을 엄마를 생각하니 안쓰러운 생각만 들었다.
“엄마는 이 가방 보면 왠지 그날 밤 내가 생각나더라. 술 한 병 마시고 눈길을 헤치고 걸어갔던 젊은 시절의 초라한 나 말이야. 그리고 굳이 이 가방은 왜 들고 갔었는지. 엄마 너무 웃기지?”
“에휴, 엄마 초라하긴 뭐가 초라해. 엄마야 말로 진짜 멋지다. 엄마가 우릴 지킨 거네. 나는 울 아빠가 슈퍼맨 같았는데, 칫, 당분간은 아빠랑 말하기 싫어."
그때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로 세상에 홀로 버림받은 기분이었는데 나름 비밀하나 안고 살면서 남편을 바라보는 것은 이상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관계의 주도권을 잡은 기분이랄까 여차하면 확 터트려서 끝내야지 했는데 남편은 모범가장이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수정의 인생은 대체로 맑음, 가끔 흐림 정도의 날씨였다고나 할까. 아픔은 덮어두니 스스로 잠잠해져갔다.
“다 아빠 잘못이지, 알고 보면. 그 여자도 피해자지. 지금 딱 연경이 나이정도 됐으려나.”
이제야 수정은 남편을 탓했다.
“엄마 그래도 아빠 얘기도 들어봤어야지. 따지지도 못하고.”
“야 김연경, 너 이거 비밀이야. 아빠한테 말하지말고.”
“칫, 엄만 이런 게 뭐 비밀이야.”
“그때 연경이 너도, 그리고 우리 연우도 너무 어렸잖아, 엄마는 그냥 세상이 멈춘 것 같이 너무 힘들었어. 가정을 지키는 게 이 길 뿐이라고 생각했어. 연경이가 크니까 그나마 이런 얘기도 하네, 실은 외할머니한테도 못했어.”
“우리 엄마 너무 힘들었겠다. 그래도 나는 같은 여자로서 아빠 용서 못 할 거 같은데, 칫”
“살다 보면 별일 다 있어. 죽고 사는 게 아니면 다 흘려보내면 되. 지나가는 비바람처럼. 그 후론 아빠가 더 잘했어. 아무 일도 없이.”
"그 여자가 우리 아빠 만나고 돌아갔을까? 엄마?"
"글쎄, 잘 모르지. 만났던 안 만났던, 뭔 상관이니. 어쨌든 우린 아빠랑 잘 살고 있고. 엄마도 이젠 괜찮아."
"저 가방 보면 그 여자랑 삼자대면했던 기억이 있어서, 가끔 생각났지."
"엄마, 싸구리가방 들고 간 것보다 훨씬 잘했어."
"내가 앞으로 더 좋은 거 많이 사줄게."
엄마의 좁은 어깨를 토닥이며 엄마를 껴안았다. 엄마의 아픈 상처들이 느껴졌다. 연경은 평생 엄마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