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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이트커피 Jan 03. 2024

할아버지가 건넨 위로

비자림

아이들이 모두 서울로 돌아갔다. 오롯이 주어진 시간, 오늘은 제주 동쪽 구좌읍의 비자림을 방문하였다. 비자나무만 2570그루, 그곳에서 만난 제주의 모습은 비자나무로 인한 초록빛 그 자체였다. 새벽에 내린 비로 공기는 아직도 물기를 머금고 있다. 숲에 발을 들여놓으니 차분한 공기가 온몸에 느껴진다. 


 식물원이나 공원에 가면 여러 종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들은 많았는데 이렇게 단일종으로 이루어진 나무숲은 처음이다. 

같은 종이지만, 가지가 뻗어 나간 모양이 또는 둥우리가 어디가 달라도 다르게 생김새가 구별된다. 마치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 같다. 비슷한 모습들이지만 제각각의 모습과 사연으로 세상을 버텨내는 듯이. 

  

 저만치 앞서가던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니 숲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 온전히 혼자가 된다. 한발 한발 숲의 마법 속으로 빠져든다. 비자림은 손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 속에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속 숲의 정령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좀 천천히 산책하기로 한다. 오래된 비자나무와 대화라도 하듯, 그들의 푸르름을 닮고 싶기라도 하듯, 다시는 못 올 것 같은 서운함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이.


  붉은 화산 송이가 깔린 길 위로 비가 군데군데 고여있다. 비 온 후에 낮게 깔린 특유의 피톤치드 향이 안개처럼 공기 중에 퍼져서 온몸을 휘감는다. 그 향이 이끄는 데로 화산 송이의 붉은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입구에서 벼락을 맞은 적이 있다는 비자나무를 만났다. 설명을 보고서야 벼락을 맞은 적이 있구나 했지 사실 외관은 잘 모르겠다. 이 백여 년 전에 벼락을 맞아 오른쪽 수나무의 일부가 불에 탔는데 다행히 암나무에는 불이 번지지 않아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지만 잘 견디고 서 있는 것을 보니 세월의 내공일까. 아마도 수나무의 아픔을 암나무가 잘 보듬었기 때문이지 싶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 금실 좋은 부부 나무가 오래오래 백년해로하기를 바랐다. 



초록의 비자림 나무 사이사이의 공백을 메꾸기라도 할 모양으로 새들이 날아다닌다. 하늘에서 생활하는 말똥가리, 황조롱이 나무 끝에서 생활하는 큰 부리까마귀, 때까치도 보인다. 나무 중간에서 생활하는 새는 박새, 직박구리, 동박새, 멧비둘기가 있으며, 덤불이나 작은 나무에서 생활하는 새에는 굴뚝새, 노랑턱멧새, 섬휘파람새가 있단다. 그리고 땅 위에서 생활하는 새에는 꿩과 종달새 등이 있다고 한다. 마냥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영역이 있고 서로 침범하지 않으면서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어우러져 살아가는 그들만의 법을 터득한 셈이다. 혼자지만 외롭지 않게 새들이 동행해 준다.


 오솔길 입구 표지판을 따라 걸어 들어가니 길은 좁아지고 숲은 더 깊어져 간다. 산책로를 따라 중간쯤에 ‘비자 사랑 나무’라는 팻말이 보인다. 나뭇가지가 하트모양이라도 만들고 있나 생각하며 들어서니 웬걸 두 나무의 줄기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 하나의 나무로 하늘을 향해 가고 있다. 두 나무가 가까이 자라다가 맞닿게 되고 서로 움직일 수 없으니 둘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맞닿으면서 서로의 압력으로 맨살끼리 부딪혀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만드는데, 이런 나무를 잘라보면 마치 쌍가마처럼 한꺼번에 두 개의 나이테 두름이 들어 있다고 한다. 합쳐진 그해부터는 사이좋게 같이 나이테를 만들었겠지.

Love Nutmeg 비자나무 사랑나무, 연리목

 비자림의 두 나무가 서로의 살을 파고들어 아픔을 지켜주며 한 나무로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것을 보니 제주 오기 몇 주전 들렀던 시골집 친정 부모님 생각이 났다.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녘, 안방에 불이 켜진다. 옅은 신음이 들린다. 아버지는 익숙하다는 듯이 몸을 일으킨다. 


  “큰 게 마렵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어두움을 가른다. 엄마는 포기한 듯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모두가 잠든 시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듯 아버지는 익숙하게 뒤처리한다. 기저귀를 치우고 깨끗이 씻기는 아버지의 손놀림은 정확하고 빠르지만 엄마를 대하는 눈빛은 안쓰럽고 사랑에 차 있다.


  인간의 존엄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가 지켜야 하는 것일까? 이것이 사랑이라고 누군가는 이야기할 것이고 누군가는 스스로 뒤처리도 못 하는데 살아야 하냐고 반문할 것이다. 대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자. 자식의 입장에서는 지고지순한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그래서 할 수 있는 헌신이라고 믿고 싶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엄마는 남은 평생을 아버지에게 기대어 저 비자 연리목처럼 한 몸으로 살아갈 것이다. 

  엄마가 당뇨합병증이 와서 뇌출혈로 쓰러지신 건 25년 전 일이다. 막내딸인 내가 막 결혼했고 첫 아이를 낳았을 때였다. 당시 IMF의 여파로 막 사업을 시작한 큰 오빠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엄마는 자신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던 큰아들의 사업 실패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셨다. 그 충격으로 쓰러지시면서 반신불수가 되어 장애인 1급 판정을 받으셨다. 


 “우리 하여사는 젊었을 때는 나한테 관심도 없고 자식들만 찾더니 나이가 드니까 철이 드는갑다, 내만 찾고로.” 


  힘든 병간호 중에 아버지의 실없는 농담에 엄마는 웃으신다. 

  고상하고 도도했던 엄마가 걷지도 못하고 자존심을 버리며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없이 그 상처를 묵묵히 감싸 안으며 한결같이 나누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그 아픔이 내게 전해진다. 나’를 우선하는 것보다 ‘우리’가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가 되는 사랑을 생각한다. 이기적인 나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말이다, 사랑은….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자 제주 비자림까지 여행을 왔지만 연리목처럼 다정한 아버지 엄마가 여행 중에 계속 생각이 난다. 오묘한 자태로 까마득하게 높이 뻗어 난 비자나무 가지와 그 위에 달린 푸른 잎, 나무 기둥을 타고 오르는 이름 모를 식물들은 이미 서로 도우며 사는 법을 알고 있나 보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아름다운 숲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조화에서 지치고 힘든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숲의 중간지점을 돌아 나오니 돌멩이 길이 펼쳐지고 그 길에 새천년 비자나무가 가지를 뻗쳐 세상 모든 것을 다 안아줄 듯이 펼쳐 서 있다. 주변의 비자나무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서 있는 폼이 기골이 장대하고 굵다. 나무의 줄기를 타고 콩짜개란, 풍란 등이 밑동에서부터 뒤덮여 같이 살고 있다. 800살이 넘어섰다는 오래된 나이 때문인지 할아버지 비자나무라는 말이 더 정겹게 다가온다. 가까운 그늘을 찾아 잠시 앉았다.

새천년 비자나무, 할아버지 비자나무, 나이: 800살이 넘음, 키:14m, 숲의 신


  ‘할아버지, 어제는 큰아들이 속을 썩여서 속상했고, 요즘은 엄마 병세가 더 나빠져서 마음이 안타까웠어요. 남편은 제 마음도 잘 못 헤아려주고, 남해 아부지도 안쓰러워 죽겠네요.’


  조곤조곤 세상사를 다 이르고 싶은 마음이다. 수백 개가 넘는 가지가 손을 뻗은 듯 품이 너른 그런 나무였다. 천년 가까이 살아왔으니 어지간한 풍파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속상했던 일, 안타깝고 서운했던 일 모두 할아버지 비자나무에게 일러바친다. 한참을 그 곁에 앉아 있었다. 옅은 여름 바람이 스친다. 할아버지가 어깨를 토닥인다.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 스치는 바람 편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따스했다. 비자림이 주는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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