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게 편지를 쓴다는 건 부끄러운 행위였다. 누군가에게 하고픈 말을 굳이 글로 쓰는 것과 그것을 전하는 과정이 큰 산처럼 느껴졌다. 별 내용 아닌 걸 썼더라도 상대방에게 그것을 전하며 거북하게 두근거렸고 편지지를 펼쳐서 읽는 상대의 표정을 살피며 죄지은 사람처럼 눈치를 보곤 했다.
그러던 내가 편지라는 것을 다른 태도로 대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중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졸업 후 다른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며 서서히 멀어졌는데, 어느 날 우리 집 우편함에 친구가 보낸 편지가 와 있었다. 친구는 그 당시 인기 있던 패션잡지를 잘라 편지봉투를 만들고 페이지를 찢어 편지지로 썼다. 모델이 한껏 포즈를 취한 사진 옆 여백에 빼곡히 친구의 글씨가 채워져 있었다. 그 한 통의 편지를 시작으로 서로 간에 수십 통의 편지가 오갔고 서로를 가장 아꼈던 그 마음으로 다시 이어졌다.
친구가 처음으로 내게 편지를 보내온 그 이후 나는 편지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친구가 했던 것처럼 잡지에 편지를 써서(글씨보다 여백이 더 많았던 패션잡지는 꽤 멋진 편지지였다) 매일 학교에서 보는 친구들과 매번 새로운 내용으로 채운 편지를 교환하기도 했고, 휴대폰으로 전할 수 있는 말들을 일부러 작은 메모지나 편지지에 써서 전하기도 했다. 누군가의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쓴다.
문구점을 둘러보다 예쁜 편지지나 카드를 구경하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고른 편지지에 내 마음을 새긴다는 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여행지에서 호텔에 가면 화장실 다음으로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구경한다. 여행하는 순간의 설렘에 호텔 객실의 고요함이 더해지면 제법 많은 이야기가 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그 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편지를 쓴다.
호텔 내에 비치된 편지지와 봉투를 한 장씩 챙겨 오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내가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누군가가 내게 편지를 쓴다는 건 새삼 많은 감정과 시간이 필요한 일인 것 같다. 한 자 한 자를 쓰면서 상대를 내내 생각하기에 진심일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편지는 그렇다. 상대와 나의 서사를 부분 부분 잇게 해주는 것.
문득 편지를 쓰듯 대화를 하면 종종 찾아오는 불편한 감정과 오해가 많이 해소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