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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sol Apr 10. 2024

가장 뜨거웠던 순간에 대한 회고

<다 하지 못한 말> 임경선 & 바롤로 와인


임경선 『다 하지 못한 말』2024, 토스트

   오랜만에 들른 서점에서 임경선 작가의 신작 소설 『다 하지 못한 말』을 집어 들었다. 몇 권의 책을 사서 잠시 목을 축이기 위해 카페에 자리를 잡았고 계획과는 다르게 앉은자리에서 『다 하지 못한 말』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겼을 때, 창밖으로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나는 소설 속 누군가의 가장 눈부시고 아픈 계절을 막 빠져나온 참이었다. 몹시 먹먹해지면서도, 사랑 앞에 자신을 완전히 연소하고 남아있는 긴 고통을 기꺼이 마주하는 한 여자의 진실한 이야기는 내게 위안과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헤어진 옛 연인에게 못다 한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서술된 소설 『다 하지 못한 말』은 공무원인 30대 여성 주인공과 세 살 연하의 피아니스트 남성 사이의 연애를 다루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주인공 여성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의 권태와 열망 사이의 아슬한 줄다리기를 공감하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그녀는 사랑에 빠진 순간만큼은 비범해진다. 상호 작용이 가능한 사랑의 특별한 점은, 두 사람을 삶의 생생한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는 데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이 들 때까지 하루 종일 당신을 그리워했어. 감각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꿰뚫고 들어왔어. 한겨울 잿빛 세상에 화사한 생기가 돌았고, 쨍하게 맑은 날엔 하늘 위 구름이 바로 손에 닿을 것만 같았어. 발이 땅에서 붕 떠서 그랬나 봐. 귀에 들어오는 세상의 사랑 노래 가사는 모두 내 얘기였어.  -『다 하지 못한 말』중에서-



  그러나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 모든 사랑은 상실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상대를 위한 극기의 헌신 또한 사랑의 지속을 위해 필요불가결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다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이토록 자기중심적이고 당신을 충분히 배려해주지 못하는 남자를 만나는 거야! 정신 차려! 왜 굳이 고통받는 선택을 하는 거냐고!’


  하지만 사랑은 지극히 비논리적이다. 흔히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더 많이 사랑한 쪽이 더 많이 배우는 법이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면 어떠한 것도 사랑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상대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 나를 온전히 헌신할수록, 그 마음의 크기만큼 우리는 아프고 성장하고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주적인 체험이다.


  나는 소설을 읽는 내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손해 보기를 극도로 꺼려하는, 실리적 관계를 추구하기에도 바쁜 현대 사회에 이토록 지극한 사랑타령이라니.

  사랑이라는 건 기꺼이 손해 보는 일임을 알고, 두려움도 없이 저벅저벅 사랑의 그늘에까지 걸어간 주인공에게 한 잔의 와인을 건네주고 싶었다.




  그 와인은 "왕의 와인, 와인의 왕"이라고도 불리는 "바롤로 와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이와 의미를 더해가는 사랑을 빚어내는 일은 어렵다. 와인에도 좋은 연애만큼이나 까다롭고 어려운 품종이 있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바롤로 지역에서 만드는 바롤로 와인은 100% 네비올로 품종으로 만들어진다. 이탈리아어로 ‘안개’를 뜻하는 네비아(Nebbia)에서 유래한 이 품종은 10월 말에야 수확이 가능한데 이 시기 피에몬테 지역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이 하나 있고, 숙성된 네비올로 껍질 표면에 안개처럼 하얀 과분(果紛)이 묻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바롤로 지역에서 나는 최고급 적포도 품종인 네비올로는 기르기에 까다로운 품종이다. 가장 먼저 싹이 트는 품종이면서도 가장 마지막으로 수확하는 품종이기 때문에 봄 서리와 과숙의 위험이 있으며, 휴지기가 짧고 생육기가 긴 특징으로 인해 그만큼 관리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석회질이 많은 토양에서 길러야 하는 동시에 각종 질병에도 취약하다 보니 소량만 생산이 가능하다.

  돌보지 않으면 이내 식어버리는 연인의 마음처럼 좋은 바롤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셈이다.


  높은 산도와 알코올, 견고한 타닌 함유량으로 인해 개성이 강한 바롤로 와인은 특유의 맑은 벽돌색을 띤다. 1차적으로는 과실향과 장미향 등을 맡을 수 있고 2차 향으로는 발사믹, 후추 향신료 향 등이 뒤따른다. 3차 향에서는 가죽, 정향, 버섯 등의 향이 지배적이다.

  복합적이고 섬세한 향을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입구가 좁은 잔에 마시는 것이 좋고, 한 시간 내외의 디캔팅 역시 추천한다.  


  2~30년 동안 장기 숙성이 가능하기 때문에 서서히 숙성시켜야 특유의 향과 맛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바롤로 와인은, 오랜 세월 동안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관계를 만드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와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좋은 땅에서 제대로 숙성된 바롤로는 특별한 매력을 갖고 있기에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늘 인기가 많다.



  사랑이 끝난 후에는, 그것이 진실한 사랑이었을수록 다 하지 못한 말이 마음에 맺혀 있고는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사랑의 기쁨과 환희, 상실과 덧없음을 모두 아는 사람이기에 그 누구보다 한 잔의 바롤로 와인을 제대로 음미하며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 『다 하지 못한 말』을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가장 뜨거웠던 순간을 말이다.


  다시 한번 누군가를 위해 뜨거워질 수 있다면. 한 잔의 바롤로 와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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