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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싼 Jul 30. 2024

부족한 만큼 더 노력하면 되겠지

Title 1 학교에서 첫 교직을 시작하다

  2019년 석사 학위와 함께 고대하던 교사자격증을 손에 넣었고, 본격적으로 구직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교생을 하고 있던 초등학교에서 첫 잡 오퍼를 받았다.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있기로 유명한 교육구로 그중에서도 인도인, 중국인들이 몰려사는 학구열 높은 곳에 위치한 학교였는데 흔히들 집살 때 많이 보는 Zillow나 Redfin에서 어필하는 “좋은”학교 점수가 10점이었던 곳이었다. (미국 교사라면 Greatschools점수가 부질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겠지만 이 점은 나중에 다루기로 하고..) 그 무렵 교사 구직시장은 호황이었고 교생을 하면 으레 포지션 제안을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 역시 별 감흥이 없었고, 거만하게도 선뜻 오퍼를 수락하기보다는 다른 곳과 비교해 보겠다는 심산으로 타코마 실내 경기장에서 열렸던 Teacher Job Fair (일종의 직업 박람회 같은 행사인데 교육구마다 부스를 설치하고 현장 면접을 보는 식으로, 마치 한국의 기업들을 떠올리는 채용 방식)에 참가했다. 


  그 당시 여러 곳에서 오퍼를 받았는데 그중 한 교육구 면접관은 내가 대학 졸업 후 줄곧 주말 한국학교에서 일해왔다는 점을 높이 산다면서 내년에 공립 초등학교 중 한 곳에서 정식으로 한국어 immersion(몰입 언어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할 예정인데 우선 당장 일 년은 평교사로 있다가 때가 됐을 때 committee(추진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솔깃했다. 원래부터 이중언어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커리어적으로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걸리는 점은 너무 멀어 통근이 쉬운 학교 근처로 이사해야 한다는 것과 이 제안을 건넨 교육구가 시애틀과 더불어 교사이직률이 높은 교육구로 손꼽히는 악명 높은 지역이라는 것이었지만 가족이나 룸메이트가 아닌 오롯이 혼자 살 수 있는 상황은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갓 졸업한 신임교사의 패기였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이직률이 높다는 것이 크게 위험요소로 와닿지 않았다. 결국 그 교육구의 오퍼를 수락했다. 


  발령 학교와 담임을 맡을 학년이 확정되고 이사 갈 준비를 마치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익숙한 곳이 아닌 새로운 곳에서 첫 교직을 시작한다는 마음속엔 설렘과 묘한 긴장감이 함께했다. 다행히 당시 동생의 남자친구였던 제부가 소방관으로 근무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안전한 아파트를 추천받아 무사히 계약을 마쳤다. 

마지막 인사를 하러 일 년간 교생 했던 학교를 방문하자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다. 이렇게 좋은 교육구를 두고 왜 굳이 그런 험한 곳을 가냐며 복도와 휴게실에서 만나는 선생님들마다 걱정과 충고를 늘어놓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가려는 학교가 Title 1 학교이고 미국 내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교수님들께 들어본 적이 있지만 그저 경제적으로 상황이 안 좋고 도움이 더 필요한 학생들이 많다는 정도였고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실질적으로 Title 1 교실에서 가르쳐본 적이 없는 분들이었기에 그때까지 현실적인 경험담을 모르고 있었다.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주변에서 아무리 무모한 결정이라 걱정할지라도 후회보다는 이미 엎지른 물,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서 최대한 옳은 선택으로 만들자고 다짐했다. 교생을 하면서 가장 답답했던 부분인 classroom management (학급운영) 부분도 이제는 더 이상 남이 짜놓은 판이 아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로 채운, 미래의 소중한 첫 제자들을 위한 맞춤형 교실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미국 초등학교 교실은 대개 배움에 필요한 아주 최소한의 것들만 갖춰있고 그 외 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직접 사비로 구입하거나 기부를 통해 지원받아야 한다. 워낙 교육구 재정이 뛰어나고 PTA (학부모회) 지원도 열정적이었던 전 학교와는 다르게 열악한 Title1 학교는 소문대로 더욱 준비할 게 많았다. 터치스크린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제대로 작동이라도 되었으면 했던 프로젝터부터 한국 90년대를 떠올리는 낡은 책걸상, 교실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교사용 책상까지. 오래된 가구들과 구시대적 발상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내가 꿈꿔왔던 학습 환경을 갖추는 것이 처음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교생을 마쳤던 6월 말부터 개학하는 9월 초까지 두 달 동안 나는 이 난관을 타파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했다. DonorsChoose(학급 프로젝트나 비용 지원이 필요한 곳에 기부할 수 있는 사이트)에서 운 좋게 지원받은 몇몇 물품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가구들을 사비로 구입했다. 9월 첫 월급을 받기도 전에 통장엔 마이너스가 찍혔다. 매일 같이 학교에 출근해 청소와 교실 준비를 했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온 밤엔 계속 커리큘럼을 읽으며 어떻게 활동을 구성해야 할지, 학생들의 개별화된 필요(ELL, IEP)에 맞추어 어떤 부분을 수정하고 보충자료를 만들어야 할지 연구했다. 출퇴근하는 차 안에서는 미리 녹음해 둔 우리 반 스물네 명 학생들의 이름을 반복해서 따라 읽으며 출석번호만으로도 이름과 성, 알파벳 철자까지 다 외울 수 있도록 계속 연습했다. 

  

  이민학생으로 다른 친구들보다 늦었던 시작. 언어와 문화라는 장벽에 할 줄 아는 건 그저 미련하게 노력하는 것 밖에 몰랐던 고등학생 시절처럼, 많은 것이 부족하다 느꼈던 그때는 그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앞만 보고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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