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안해요, 리키'
지난 8월 14일부터 16일까지는 택배 산업이 생긴 지 28년 만에 생긴 ‘택배 없는 날’ 이었습니다. 코로나 19가 등장한 이후 바빠진 택배업이 모처럼 3일 동안 쉴 수 있는 날이었죠. 진짜 맘 놓고 쉴 수는 없다는 말도 나왔지만, 공식적으로 쉴 수 있다는 날이 만들어진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릴 영화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감독이 3년 만에 찍은 영화입니다. 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의 기대를 모으는 켄 로치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묵직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는데요. 제72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우리나라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나란히 경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기생충'도 대단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보니 수상하지 못한 것이 아쉬울 정도였는데요. 은퇴를 고민하던 감독이 3년 만에 들고 온 영화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오늘 소개해드릴 영화는 ‘미안해요 리키’입니다.
영화는 영국의 평범한 4인 가정 이야기입니다. 아빠 리키(크리스 히친 분)는 주로 건설 현장 일용직을 전전하다 이제 택배 기사로 새 삶을 살려 하는 가장이고, 엄마 애비(데비 허니우드 분)는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죠. 이들에겐 사춘기 아들 세브(리스 스톤 분)와 딸 리사(케이티 프록터 분)가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영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긱 이코노미(gig economy)’와 ‘제로 아워 계약(zero-hours contracts)’, 이 두 용어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하는데요. 먼저 긱 이코노미란 고용주의 필요에 따라 계약을 맺고 노동력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경제 형태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아르바이트나 프리랜서를 포함합니다. 배민커넥트나 쿠팡이츠 같은 서비스가 대표적인 긱 이코노미라 할 수 있죠.
제로 아워 계약은 정해진 근무시간 없이 임시직 계약을 한 뒤 일한 만큼 시급을 받는 계약 형태를 말합니다. 최저임금과 최소 근무시간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일명 ‘노예 계약’으로도 불립니다.
리키가 택배 회사와 계약을 하는 것에서 영화는 시작하는데요. 이때 고용인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것이다. 자영업자와 마찬가지이며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하는데요. 앞서 말한 긱 이코노미 형태의 근로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근로자에게 좋게 들릴진 몰라도 달리 해석하면 최소한의 노동권과 생존권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은 리키는 본인이 일을 열심히 해서 빚도 갚고 집도 사야겠다는 꿈을 꾸지만 얼마 안 가 그렇지 못하다는 걸 몸소 깨닫게 되죠.
애비 역시 리키와 같은 형태로 일합니다. 제로 아워 계약을 통해 자신이 돌봐야 할 노인을 찾아다니는데요. 24시간 대기조로 개인 시간 없이 필요에 따라 움직여야 하므로 요즘 흔히 말하는 ‘워라벨’을 지킬 수 없죠.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족들과 식사 아니 대화조차 나눌 시간도 없게 되고, 이에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들 세브는 점점 삐뚤어져 나갑니다. 하루에 14시간씩 일하며 살아보려고 발버둥 칠수록 늘어나는 빚에 소박하지만 단란했던 가족의 일상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전작에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장한다는 영국의 복지제도 맹점을 꼬집은 켄 로치 감독은 이번에 긱 이코노미라는 소재로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만연한 ‘노동력 착취’를 화두로 끌어올렸습니다. 평범한 가정이 이러한 노동 구조를 통해 어떻게 파괴되는지 가감 없이 보여주는데 마치 내 가족, 내 주변 사람의 이야기 같아 공감하며 함께 마음 아파하게 되죠.
이런 사실적인 묘사가 가능했던 건 주연 배우의 연기 덕분입니다. 리키 역의 크리스 히친은 실제로 20년간 배관공으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캐스팅 합격 전화도 다른 집 보일러를 고치고 있을 때 받았다고 합니다. 애비 역의 데비 허니우드도 남편이 정리 해고를 당해 보조 교사로 생계를 이어나간 경험이 있으며 두 자녀 역인 케이티 프록터와 리스 스톤은 이 영화를 통해 데뷔한 배우들로 때 묻지 않은, 어딘가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은 그 나이 또래의 캐릭터를 보여주었죠.
영화를 보고 든 생각은 ‘왜 이제서야 이 영화를 봤을까’ 였습니다. 물론 개봉 당시부터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상영하는 영화관도, 상영한다고 해봤자 아침 아니면 밤 시간대밖에 없어서 놓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봐야 하는 영화였는데 말이죠. 영화의 제목처럼 이제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되어 정말 ‘미안해요, 리키’. 여러분도 더 늦지 말고 이번 기회에 꼭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