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만 원의 육아휴직급여보다 값졌던 아버지와의 한 달
서울에서 고향까지는 차로 5시간이 걸린다.
대학교에 입학하며 집을 떠난 뒤로, 고향은 늘 마음 한구석에 숙제처럼 남아 있는 곳이었다.
명절에 한 번, 길어야 1년에 한두 번 내려가는 게 전부였던 20여 년.
그 5시간은 물리적인 거리이기도 했고, 바쁘다는 핑계이기도 했다.
그런데 마흔 중반, 육아휴직을 하고 나서 올해만 벌써 네 번이나 고향 땅을 밟았다.
20년 넘게 멀게만 느껴졌던 길이, 휴직을 하자 이상하게도 “언제든 갈 수 있는 길”로 바뀌어 있었다.
육아휴직 서류에 도장을 찍고 회사를 나서던 날, 내 마음을 채운 건 해방감이었다.
5년의 주재원 생활을 버티고, 본사에서의 방황까지 겪은 뒤였다.
국가가 허락한 합법적인 쉼표가 내 앞에 놓인 느낌이었다.
더 달콤했던 건 통장에 찍힌 숫자였다. 휴직 후 첫 3개월 동안 나오는 250만 원의 육아휴직 급여.
매일 아침 전쟁터로 출근하지 않아도, 돈은 들어왔다.
나는 정말 아무 걱정 없이 쉬었다. 늦잠을 자고, 아이 등교길을 함께하고, 아내와 평일 낮 카페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보기도 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게 사람 사는 거지.’
그 평화를 깬 건 고향에서 온 전화 한 통이었다.
오래전 뇌졸중을 앓으셔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셨던 아버지께서
넘어지면서 왼쪽 무릎뼈를 다치셨다는 소식이었다.
한쪽 다리에 기대어 겨우 걸어오던 분에게, 남은 한쪽마저 쓸 수 없게 된 상황은 치명적이었다.
나는 그 길로 짐을 쌌다. 회사에 묶여 있던 시절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결정이었다.
휴직이 아니었다면, 주말에 잠깐 얼굴만 비추고 마음 불편한 월요일을 준비했을 게 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고민 없이 5시간을 달려 내려갔다.
그렇게 마흔 중반의 아들이 혼자 고향 집으로 내려가 부모님과 한 달을 살게 되었다.
아버지를 수발하며 보낸 그 한 달은, 내가 알던 ‘부모님’ 너머를 보는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생각보다 훨씬 작아져 계셨다.
기저귀를 갈아드려야 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화장실을 가거나 식사를 하실 때마다 내 어깨에 의지해야 했다.
어릴 적 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아버지의 어깨가, 어느 순간 내 손 안에서 한 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찡함이었다.
“야야, 니 휴직 안 했으면 이 일을 우짤 뻔했노.”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이 들릴 때마다, 250만 원이 주는 즐거움과는 다른 종류의 안도감이 밀려왔다.
내가 멈춰 있었기에, 누군가의 무너짐을 바로 옆에서 받쳐줄 수 있었다.
그 사실 하나가 나를 조금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아버지는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하신 채로도 당신의 일상을 지키려 하셨다.
특히 나를 놀라게 한 건 대구까지 이어지는 신학 공부였다.
몸이 불편하시니 이번 학기는 좀 쉬시라고 말렸지만, 아버지의 의지는 완강하셨다.
결국 나는 ‘박 기사’가 되어 아버지를 모시고 매주 대구로 향했다.
휠체어를 차에 싣고, 깁스한 다리가 불편하지 않게 조수석에 앉혀드렸다.
왕복 2시간. 그 차 안에서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거창한 조언 같은 건 없었다. 창밖 풍경 이야기, 과일값이 올랐다는 어머니의 걱정, 그리고 “요즘은 어떠냐” 같은 짧은 질문들.
아버지는 예전보다 말씀이 줄어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차갑지는 않았다.
말 대신 시간이 쌓였고, 그 시간이 우리 사이를 조금씩 풀어줬다.
예전 같으면 “바쁘다”는 말로 건너뛰었을 그 아무렇지 않은 시간들이 쌓이면서,
20년 동안 굳어 있던 5시간의 거리감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한 달간의 동거 후에도 나는 자주 고향을 찾았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 아내와 아이, 우리 가족이 함께였다. 그때 이상한 장면을 하나 목격했다.
아버지는 몸이 아프신 뒤로 말씀이 더 줄었는데, 손주만 보면 달랐다.
아이 얼굴을 보는 순간, 아버지 입꼬리가 먼저 움직였다.
평소엔 “그래” 한마디로 끝날 대답이, 손주 앞에서는 길어졌다.
“학교는 어땠노.” “배고프제.” “와, 이거 니가 만들었나.” 말이 늘었다기보다,
아버지의 온도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더 자주 여행을 떠났다.
사진을 찍고, 맛있는 걸 먹고, 펜션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한 공간에서 같이 자고 일어나는 시간들.
모든 숙소와 일정, 이동 동선은 전부 내가 짰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이드나 다름없는, ‘일’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내가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하는 동안 나는 가족 안에서 다시 내 자리를 찾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회복은 병원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사람 사이에서 더 자주 일어났다. 몸은 여전히 불편해도, 마음이 풀리면 사람은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백미러 속에 작아지는 고향 집을 보며 생각했다.
회사에서 5년을 뜨겁게 일하며 얻은 성과급보다,
휴직 급여 250만 원을 받으며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어드린 이 한 달이 나에게는 더 값진 시간이었구나.
나는 그 시간을 통해 엔진을 고친 게 아니다. 내 삶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서울로 향하는 5시간. 이제 이 길은 더 이상 멀고 지루한 길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달려갈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익숙한 길이 되었다.
나의 8개월 정지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채우며 깊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휠체어를 밀던 손으로, 이번엔 아이 손을 잡고 비행기에 오른다.
목적지는 5년간 내 청춘을 바쳤던 그곳, 베트남.
하지만 이번엔 ‘법인장님’이 아니라, 가장 무거운 계급장을 떼고, 오직 ‘아빠’로 돌아간 그곳.
다음 3화, ‘비행기 티켓으로 산 가족의 웃음’에서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