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때 친구랑 재미로 대학로에 있는 사주까페를 갔었다. 그것이 태어나 처음 점을 본 시작이었다. 기억나는 말은 하나도 없고, 그때 느꼈던 흥미진진한 느낌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태어난 날짜와 시간만으로 생전 처음 보는 아주머니와 그렇게 얼굴을 맞대고 화기애애하면서도 심각한 시간을 보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참 묘하다.
그때부터 나는 사주풀이, 별자리 운세, 명리학, 타로카드 등을 보러 다니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이곳저곳을 보러 다니니 어느 정도 듣는 말도 비슷해져서 전혀 엉뚱한 사주풀이를 내놓는 곳에선 ‘여긴 아니구나.’ 하는 나름의 평가까지 스스로 내렸다.
새해가 시작되면, 연례행사처럼 신년운세를 보러 갔다. 연초에 들었던 말은 사실 그해 여름이 오기도 전에 거의 지워졌지만, 때때로 기분 찜찜한 일들이 생기면 더러 무릎을 치기도 했다.
언제 남자 친구가 생길까요?
그 사람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이렇게 간질거리는 풋풋한 고민도 있었다. 20대를 지나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점집에 매료된 진짜 이유는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한 그들만의 해석이었다.
내가 살아온 지난 과거의 시간들이 어렵고 힘들었던 이유.
평범한 가족이 아니었던 상황들.
고립되어 살아온 막막한 외로움.
아버지에 대해선 얼음처럼 냉정하면서도
그 반대로 내 어깨를 짓누르는 엄마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
내 마음속에 흩어져 있던 파편들이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울컥 올라왔다. 처음엔 눈물이 나고, 감정적으로 심하게 동요했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어두운 부분들을 차분하게 설명해 주는 그 과정들이 위로가 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억울함이 풀리고 뚫렸던 구멍이 조금씩 채워져 나갔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고, 심지어 나조차도 보고 싶지 않았던 조각들이었다. 무시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닌데. 억지로 숨겨놓았기 때문에 조금만 스치기만 해도 더욱 날카롭게 나를 찔렀던 것들이었다.
천간(天干)과 지지(地支) 속 글자들이 나의 지난 과거를 어루만졌다. 담백한 얼굴로 무덤덤하게 나의 빈 곳을 읊어나갔다. 누구에게도 따져볼 수 없었던 나의 결핍을 하나씩 풀어나가면서 앞으로의 미래와 연결시켰다. 듣기 좋은 희망이 섞여 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나의 그림자들을 가뿐히 이해시켜 주었다. 마음 대신 머리가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했다. 슬프지 않고 시원했다. 실컷 울고 점집을 나서면서 나는 역술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명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모두가 결핍을 가진다. 육십갑자 중에서 제아무리 잘난 인간이라고 해도 여덟 글자 밖에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어딘가 모자란 삶을 살아간다고 했다. 가을에 핀 벚꽃이라고 해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와 우주의 질서가 그 시점, 그곳에 우리를 내려 두었다.
" 다 팔자소관입니다. 지난날 어렵게 살아왔어도,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좋아요. 손님은 대기만성형이니 하고 싶은 일 놓지 말고 끝까지 해보세요. "
미신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내면의 불안과 결핍에 대해 성의 있는 위로와 용기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