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게임의 룰은 간단하다.
니 결핍을 읊어봐.
나: 네?
A: 말귀 못 알아듣냐? 다시 한번 말한다. 여기선, 가지고 있는 걸 말고 가지지 못한 것만 취급한다. 대단히 결핍해야 이곳에서 탈출한다.
나:... 지,,집이 없습니다.
A: 또.
나: 돈도 없는 거 같은데요.
A : 또.
나: 지난달에 차를 팔았습니다. 차도 없습니다.
A : 장난해? 그 정도는 결핍이 아니지.
나: 아, 아버지가 없습니다.
A: 다행이군. 그게 결핍인가?
나: 결핍이죠. 아버지가 없는데.
A : 아버지가 왜 있어야 하지?
나 : 당연히 있어야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사람이니까. 중요한 가족이죠. 아버지가 없는 애가 세상 사는 게 얼마나 불편한 점이 많은지 아세요?
A : 어떤 점이 불편한데?
나 : 우선,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아버지가 돈을 벌어다 주지 않으니깐 생활이 어려워지죠. 나처럼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리면 더 최악이죠. 수능 준비만으로도 머리가 터지는데 아버지까지 가출해버리면 엄마와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거기다가 엄마까지 경제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게 식당 설거지나 남의 집 파출부 일이면, 절망은 거기서 끝이 아니죠. 대학에 들어가도 문젭니다. 바로 돈을 벌어야 하니까. 꿈 같은 건 쓰레기죠. 세상에 악밖에 안 남아요, 아버지가 없으면 자식은 그렇게 됩니다.
A: 음. 조금 불편하겠군. 그래도 취직했잖아. 돈 벌면 된 거 아니야?
나 : 취직해도 끝난 게 아니죠. 사람들끼리 가족 이야기할 때 얼마나 어색한지 알아요? 자기네 아버지 이야기할 때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죽었다고, 살았다고 하기도 모두 애매하니까요. 무슨 서른 다 넘은 어른들이 유치원생도 아니고 시시콜콜 자기 집 사는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지 이해는 안 되지만. 어쨌든 하하호호 분위기에 찬물 부을 수도 없고, 억지로 대충 웃고 있지만 속은 울렁거리죠. 내가 한 잘못도 아닌데 늘 거짓말하는 거 같아서 찝찝해요. 어딘가 그늘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거 짜증나요.
A : 그냥 말해. 아버지 가출했다고.
나 : 미쳤어요? 그런 이야기 남한테 왜 해요?
A : 그런 말도 못하는 남한테 뭘 그렇게 신경을 쓰냐?
나 : 그게 사회생활이거든요.
A : 별... 끝이야?
나 : 아니요. 아버지가 없으면 결혼할 때도 신경 쓰이는 게 많죠. 일단 상대방 쪽 가족에서 불편해해요. 왠지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게 싫어서 나도 결혼하는 거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어요. 식장에 아빠 손 잡고 들어가는 소소한 고민거리는 눈감는다 해도. 나름 숨겨놓고 살아온 나의 결핍이 결혼을 준비하면서, 결혼식 당일, 그리고 결혼 후에 얼마간은 강하게 느껴지죠. 아버지가 없다는 게.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알 수 없는 막연한 부재. 나한테도 설명이 안 되는 이 상황을 남한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A : 너는 뭘 그렇게 설명할 게 많냐.
나 : 그러게요. 나도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아요. 나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관심 끄고 다들 살았으면 좋겠어요. 각자 인생에만.
A : 아버지는 어디 사는지 알아?
나 : 몰라요.
A : 살아있을까?
나 : 몰라요.
A : 죽었을까?
나 : 몰라요.
A: 니 말을 다 들어보니, 결핍이 꽤 인정할 만하네. 여기서 나가도 좋다.
나: 아버지가 없다는 건 꽤 큰 결핍이죠.
A : 아니. 그게 아닌데.
나: 네?
A : 넌, 아버지를 전혀 그리워하고 있지 않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