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번째 이야기
1914년 12월 31일
해가 머리 위로 올라왔을 때, 파도의 세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멀리서 고래 떼가 오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본선에서 보트 두 척이 내려갔다.
잠시 후, 보트 두 척은 방향을 틀어 포경선에 닿았다.
“ 에이, 뭐 큰 거는 아니고, 참고래네. 괜히 긴장했네. 어서 잡자고.”
참고래는 선원들에게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 크기는 어떻노?”
본선에서 이 씨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 묻는다.
“ 별로, 막 크진 않은 거 같아. 적당해.”
보트에 타고 있던 한 선원이 대답했다.
“ 그릇나? 근디 파도가 영 이상한데.”
이 씨의 표정이 께름칙해보였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이었다.
보트의 선원들은 준비해둔 작살을 정비했고, 가까운 거리에서 참고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작살을 던져 고래를 찔렀고, 놀란 고래는 꼬리를 휘두르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고래의 사체를 건지기 위해 그물이 포경선에서 아래로 쳐졌다. 일련의 과정들이 착착 진행되자 그제야 이 씨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갑판 위에서 지켜보던 한 영감의 얼굴이 갑자기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옆에 서 있던 김 씨에게 소리쳤다.
“ 귀신 작살 가지고 오고, 니는 얘들한테 시켜서 창고 안에 있는 란스 전부 꺼내라 해라.”
김씨는 의아한 듯 물었다.
“ 아이고, 영감님. 참고래는 얼라들이 알아서 함미데이. 그카고 귀신 작살 쓰기엔 쪼마
그르치 않습니꺼? 또 크기도..”
김 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영감은 천둥같이 소리쳤다.
“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라!! 고마, 니 목숨 보전 할라카믄 내 말 잘 들으랏!!”
영감의 눈에 서린 불안과 분노를 본 김 씨는 곧바로 뭔 일이 벌어질 것임을 감지했다.
갑판 위 모든 선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영감은 선원들 쪽으로 몸을 돌려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다들 내 말 똑디 들으래이. 무조건 살아남아라. 알긋나? 죽겠다 생각하고 덤비면 살아남는데이. 살겠다고 수그리면 제일 먼저 황천길에 가게 될끼다. 지 목숨 챙길 것들 다들 챙기라. 어서!! 퍼뜩!!”
영감의 말이 끝나자, 갑판 위 선원들은 여기저기 불에 덴 듯 뛰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워진 갑판 위로 재수가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 뭔 일이지?”
핏덩이 때부터 포경선을 탔던 재수에게도 이 상황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바다 안에서 지진이라도 난 듯 갑판 전체가 울렁거리며 진동했다.
배 위 사람들은 얼음이라도 된 듯 숨 쉬는 것조차 멈추었다.
발끝에 와 닿는 모든 것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사방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머리 위에 떠 있던 태양이 사라졌다.
묵직한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더니 두꺼운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후두두둑
심상치 않은 기운이 역병처럼 배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늘빛과 바닷빛이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검푸른 색으로 빠르게 번져 두 경계가 없어졌다.
“ 길,길 길잡이 고,고래다!!”
배의 바로 앞머리에 길잡이 고래의 얼굴이 정면으로 드러났다.
고래의 눈알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배 안을 샅샅이 살피는 것 같았다.
사십 년 넘게 고래를 잡아왔던 한 영감도 다리 밑이 떨렸다.
' 고래가 맘을 먹었구먼. 끝장을 보기로….’
누구 하나 먼저 작살을 집어 던지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이는 선 채로 오줌을 지리는 자도 있었다.
고래의 얼굴이 슬며시 아래로 향하더니 바다 아래로 사라졌다.
그제야 이곳저곳에서 입이 터지며 웅성댔다.
“ 저.저게 뭐꼬? 뭐 저런 고래가 다 있노? 물고기가? 귀신이가?”
“ 뭐를 찾는 거 같은데. 뭐를 찾는기고?”
“ 헉... 헉. 이게 뭐꼬?? 방금 그게 뭐시긴데.”
“ 영감, 그게 뭡니꺼?”
“ 이거 잡는 겁미꺼? 아님 토껴야 되는 겁미꺼?”
배 위 사람들은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이 고래는 비정상적으로 덩치가 큰 놈이었다.
단 한 번도 그들이 상대한 적 없는 크기였다.
그것은 고래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웠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라. 안 그카믄 오늘 여기서 다 개 죽음인기라.”
한 영감의 외침은 배 위의 공기를 가로질렀다.
포경선은 괴물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창고에 있는 모든 작살과 란스를 꺼내 들었고,
배 안의 모든 그물들이 아래로 펼쳐졌다.
몇몇은 힘을 모아 바다 위에 떠 있는 보트 두 대를 밧줄로 끌어 올렸다.
보트 두 대 중 한 대가 포경선 안으로 들어왔고,
나머지 한 대도 포경선 아래쪽에 거의 닿았을 때 일이 벌어졌다.
수면 위로 커다란 물보라가 일더니 거대한 검은 꼬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곧바로 꼬리를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더니 보트를 강하게 내리쳤다.
보트가 가루처럼 으스러지고 그 안에 타고 있던 열 명의 선원 중 반은 물속으로 빠졌다.
나머지는 몸이 반 토막 나버렸다.
본선에서 밧줄을 끌어당기고 있던 일곱 명의 선원도 힘에 이끌려 아래로 떨어졌다.
“ 야! 야 이 새끼들아. 안 된다!!”
이 광경을 지켜본 본선의 선원들 모두 혼비백산 정신이 나갔다.
바다 안에 빠진 나머지 선원들 중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은 살려달라고 악을 쓴다.
그들의 피로 바다가 서서히 붉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래는 만족을 몰랐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포경선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수면 위로 다시 회색빛 혹이 불쑥 올려 보내더니, 꼬리를 상하로 세게 내리쳤다.
바다가 반으로 쪼개질 듯 파도가 치고, 놈은 곧장 배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와 동시에 한 영감은 날듯이 귀신 작살을 위로 들어 뱃머리로 뛰어 올라갔다.
고래의 이상한 행동을 알아차린 항해사는
“ 선장님, 우현시키겠심더. 이러다 배가 박살남미더!!”
라고 선장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선장은 한 손을 들고 침착하게 말했다.
“ 멈춰. 그대로. 도망치기엔 이미 늦었다.”
“ 에?? 이러다 다 죽심미더!!”
“ 한 영감을 믿어보자고.”
선장은 자신이 기다린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놈은 배의 좌현 닻줄 아래를 정통으로 들이받았고,
배는 거대한 암초에 정통으로 충돌한 것처럼 전체가 덜컹거렸다.
사람들은 모두 나둥그러지고, 몇몇은 배 아래로 뛰어내렸다.
배의 갑판이 갈라져 나무판이 쩌어억 소리를 내며 위로 탁 튕겨져 그 위에 있던 선원 한 명의 오른쪽 어깨에 날아와 그대로 꽂혔다.
“ 으아아악!!”
갑판 조각이 꽂힌 오른쪽 팔이 반대편으로 틀어지고 핏방울이 튀어 재수의 얼굴에 튀었다. 배의 앞머리는 위로 솟구치고 꼬리편은 서서히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때, 한 영감은 힘껏 위로 올라간 배의 앞머리를 밟고 뛰어올라 놈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다음으로 정확하게 고래의 오른쪽 눈알에 작살을 내리꽂고
“ 으으아아악!!”
괴성을 내며 돌려 빼냈다. 영감은 죽을힘을 다해 제 죽을 길로 가는 듯했다.
곧이어 온 세상이 남에서 북으로, 동에서 서로 갈라지는 소리가 공기 속으로 퍼져 나가며 수평선 끝에서부터 하얀 포말의 파도가 일었다.
놈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사방으로 몸을 뒤흔들며 머리를 떠올려 선체 아래를 박치기했다.
한 영감의 작살 끝에는 핏물과 점액으로 범벅된 고래의 눈알이 꽂혀 있었다.
영감은 고개를 돌려 항해실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선장의 눈과 마주쳤다.
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찰나 놈은 장막 같은 입을 벌려 영감 몸의 반쪽과 배 앞머리 일부를 으스러뜨렸다.
“안돼!!!”
재수가 비명을 내질렀다.
아이의 얼굴은 눈물과 공포, 절망으로 뒤범벅되었다.
영감의 왼쪽 다리가 밑에서 배꼽 언저리까지 잘려 나가고 그 밑으로 시뻘건 내장이 흘러 내렸다. 그래도 놈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배의 밑바닥으로 잠수하여 가운데 부분에서 기둥처럼 솟아올랐다. 배는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수십 개의 작살이 놈의 얼굴과 몸 위로 비 오듯 쏟아졌지만, 누구도 놈을 막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아직 살아남은 선원들은 배를 포기해야 했다.
그들 중 일부는 보트에 몸을 싣거나 그도 못하면 간신히 널빤대기에 몸을 가누었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
재수는 온몸을 비틀며 물속으로 사라진 한 영감을 애타게 불렀다.
아이는 선장과 함께 작은 보트를 타고 있었다.
그 보트 외에도 여섯 척 정도의 보트가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놈은 이 바다에서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이내 작은 포경 보트들을 하나씩 내리치고 부숴 버렸다.
그때였다.
재수가 타고 있던 보트가 왼쪽으로 기우뚱했다.
선장은 어린 재수가 옆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어깨를 감싸 안았다.
새파랗게 변한 손이 쑥 올라와 보트의 왼쪽 모퉁이를 강하게 잡았다.
“할아버지?”
재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모퉁이 쪽으로 다가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할아버지가? 할아버지!!할아버지!!”
또 한 번 아이는 한 영감을 불렀다.
“ 영감님!!!”
아이 뒤에 있던 선장도 같은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수면 위로 시퍼렇게 변한 손이 쑥 올라와 재수의 손을 덥썩 잡았다.
“ 으으으악악!!”
재수는 기겁하듯 고함을 질렀다.
뒤에 앉아 있던 선장이 일어나 아이를 구하려 하자, 갑자기 재수가 소리쳤다.
“ 잠시만요. 잠시만요. 흑. 할아버지 같아요.”
재수의 손 위로 둥그런 하얀 공이 떨어졌다.
고래의 눈알이었다.
그리고 힘이 빠지는 듯 시퍼런 손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재수는 그 손을 따라가려고 보트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보트 안에 선장을 포함해 남은 세 명의 선원들이 재수를 억지로 안으로 끌어당겼다.
“ 흑흑흑, 할아버지. 할아버지.”
울산항에 보트가 다다를 때까지 사내아이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