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집으로 돌아오다.

by 오 광년


1915년 1월 7일


재수는 배에서 내려 처음으로 다이지 땅을 밟았다.

낯선 바다, 낯선 공기, 낯선 사람들의 얼굴과 말소리에 아이는 기가 죽었다.

어색해하는 재수의 손을 겐토는 따뜻하게 잡아 주었다.

“ 선장...님?”


재수는 고개를 들어 겐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겐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재수야. 앞으로 우리 집에서 지내자. 할아버지와 약속했단다.”

“ 할, 할아버지하고. 약속이요?”


재수의 까만 눈에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는 막막하고 시커먼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일본인 선장뿐이라고 생각했다. 암담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선장이 재수의 손을 잡고, 그의 집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대나무 숲이 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거대한 연못을 보고 재수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 우와 - ”


그때였다.

“ 아빠, 이 아이는 누구야?”

앞이 보이지 않던 딸, 주리가 손으로 정확히 재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 주리야? 너 지금 뭐 뭐라고 했니?”


겐토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딸과 함께 남편을 마중 나온 그의 아내도 놀라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겐토는 재수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얼른 딸에게 달려갔다.

딸 앞에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 물었다.


“ 주리야. 저 아이가 진짜 보이니?”

“ 응. 보이지. 근데 옷이 왜 저렇게 더러운 거야?”

주리의 눈은 똑똑히 재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겐토는 딸과 부인을 함께 껴안으며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기적처럼, 주리의 눈이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그는 딸을 안은 팔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며 생각했다.

‘ 됐다. 되었어. 우리 주리가 눈을 떴어. 우리 가족은 옛날처럼 행복하기 지낼 일만 남았어. 물론 많은 희생은 있었지만, 부모라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그리고 나는 고아로 남은 재수도 기르기로 마음먹었잖아. 그 정도면 충분해.’


그렇게 겐토는 생각했다. 바람에 날려 떨어진 댓잎 한 장이 재수의 어깨 위로 올라와 앉았다.

공기처럼 가벼워서 재수는 이를 알아채지 못했지만...재수는 먼발치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을 한참동안 쳐다보며 혼잣말로 말했다.


“ 할아버지 보고 싶다.”


며칠이 흘렀고, 재수는 낯선 다이지의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겐토의 아내는 성품이 여리고 고운 사람으로 재수를 따뜻하게 보살폈다.

딸 아이 혼자 자라는 것이 마음에 쓰이는 부분도 없지 않았고.

“ 아이들은 아이들이군요. 저렇게 금방 친해지는 걸 보면...”

두 아이가 정원에서 장난치며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재수가 처음 이 집 정원을 밟았을 때부터, 주리는 재수를 잘 따랐다.

“ 재수는 원래 밝은 아이요. 당차고 똑똑해.”


겐토는 갓 우려낸 녹차를 조금 마시고 답했다.


“ 고마운 아이예요. 어쨌든 미안하기도 하고 마치 주리 때문에….”


아내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겐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절에 좀 다녀오겠소. 돌아오고 나서 아직 스님을 뵙지 못했소.”


겐토의 말에 아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겐토는 재수를 데리고 노승이 있는 산사에 닿았다.

언제나 그곳은 한결같이 푸르고 고요했다.

울창한 대나무 숲 아래에서 명상에 빠진 노승의 뒷모습이 보였다.

숲 사이로 바람이 두 번 크게 불고 나서야, 노승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건넸다.

“ 겐토. 잘 돌아왔네. 조선 아이도 데리고 왔구먼.”


선장은 “예-” 하고 답하며 두 손을 합장하고 작게 절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재수도 함께 그 행동을 따라했다.

그러자 허허 웃으며 노승이 뒤돌아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겐토와 재수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재수의 얼굴을 말없이 유심히 살펴보았다.

재수도 그런 노승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함께 마주보았다.

노승, 허허 다시 웃고, 어린 동자승을 점잖은 목소리로 불렀다.

“ 이 아이를 데리고 산사 구경 좀 시켜 주고 오너라.”

머리가 동그란 동자승은 합장하더니, 재수에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어린 동자승을 따라가던 재수는 고개를 돌려 노승을 쳐다보았다.

노승, 역시 재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아이 둘이 사라지자, 겐토는 조심스레 노승에게 입을 뗀다.


“스님, 딸아이가 눈을 떴습니다. 감사의 말씀 드리러 왔습니다. 이게 전부 부처님의 은혜입니다.”

“자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정말로 그게 부처님의 은혜라고 생각 하냐고 묻는 걸세?”

“아...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겐토의 대답 소리가 맥없이 들렸다.

노승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다 말했다.


“부처님의 뜻이 아니라네. 그건 나도 알고 자네도 알고 있지. 믿어선 안 되는 자의 말을 따른 거지. 내가 자네에게 그자에게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았나.”

“스님. 그건 제가 간절히 부탁했기 때문이잖습니까.”

“나도 자네가 어린 딸을 잃을까 슬퍼하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어. 나도 어리석었다네. 사실, 내가 자네가 돌아오지 않길 바랐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자네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는 말은 많은 사람이 화를 입고, 자연의 이치를 거슬렀다는 뜻이 아닌가? ”

노승의 말에 겐토는 충격을 받았다.

피하고 싶었던 진실이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후에 그는 천천히 입을 뗐다.

“ 스님... 딸이 눈을 떴으니 이제 저는 더는 바랄 게 없습니다.”


겐토의 말에 노승은 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더는 바랄 게 없다...더는... 바랄 게 없다... 그 말이 진심이라면, 앞으로 자네와 자네 가족에게 생길 일들을 자넨,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오.”

그는 눈을 뜨고 겐토의 얼굴을 차분히 내려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 분명, 지금 자네가 말한 바랄 게 없다는 그 마음이 진심이길 바라오. 욕심을 부리지 않는 마음. 주어진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인간이 그 마음을 얻기란 쉽지 않지만, 부단히 노력하시오. 그러면 조금이라도 앞으로 닥칠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오.”

“.. 스님, 그럼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네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할 자신이 정말 있는가?”

“화를 피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딸을 절로 보내게. 그럼 되네.”

“예?”

“그리고, 고래 잡는 일에서도 손을 완전히 떼버리게.”

“ ??? ”

“왜? 못하겠는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노승의 얼굴을 보고 겐토는 황당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스님 너무 갑자기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당황스럽습니다.”

“ 허허허. 이보게 자네. 지금 자네 모습을 잘 보라고. 아직도 자네는 마음을 비울 줄을 몰라. 손에 쥐고 있는 걸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나. 딸의 눈만 뜬다면 바라는 게 없다고 장담했던 사람은 어디 갔는가.”

“ 아니, 그건 그렇지만...”


겐토는 더 이상 노승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이제야 병마에서 벗어나 딸을 절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포경 사업을 잠시가 아니라 완전히 접는 것은 상상해보지도 못한 일이었다.

겐토의 얼굴이 복잡하고 난감하다.

노승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일어난 일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고, 억지로 바꾸어버린 건 나중에 더 큰 화를 가지고 올 것이야. 이제라도 마음을 비우기 위해 노력하게나. 물이 흘러가게 내버려두게. 파도의 흐름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 내가 이제 해줄 말은 그것뿐이라네. 그리고 다시 그자에게 가는 일도 하지 말게나. 절대로!”


노승은 그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선장님!”


어느샌가 재수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겐토는 무언가 우울한 기운을 씻어내려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제 내려가자꾸나.”


산을 내려가는 겐토와 어린 재수.

그 둘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노승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단한 아이를 데리고 왔구먼. 쯧쯧. 세상을 삼킬 아이야.”

뒤에 서 있던 동자승이 “ 무슨 말이십니까? 스님” 이라고 물었지만, 노승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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