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문

아무것도 하지 못하기에, 그래서 가장 값진 위로.

이예린의 <싸구려 위로>

by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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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려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 <공감연습, 레슬리 제이미슨>




슬픔을 공부한다는 것. 공부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배우는 일이고, 모르는 것을 배우는 학자는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기저에 깔고 있어야 한다. 학자라면 그렇다. 그러니, 슬픔을 공부하려 하는 이는 나는 슬픔을 알지 못한다는 전제로 공부해야 한다. 나는 그들의 슬픔을 모두 알지 못한다. 그들의 슬픔을 알 수 없기에 나의 슬픔과 그들의 슬픔을 비교할 수 없다. 여기에 약간의 비약을 더하자면, 감정의 불가해함으로 인하여 삶은 그저 커다란 슬픔의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평생을 공부해도 누군가의 슬픔을 정확하게 알 수 없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의 슬픔을 가장 정확하고 고귀한 방식으로 위로하고자 하는 이는, 내가 당신의 슬픔을 안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면 안된다. 나도 다 해봐서 아는데 말이야, 나때는 말이야, 원래 다 그런 법이야... 라는 식으로 나라는 슬픔의 덩어리가 너라는 슬픔 덩어리와 그 크기가 같다고 오판하면 안되며, 그런 위로를 함부로 건네서도 안된다. 그건 위로가 아닌 오만이고 기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타인의 슬픔을 가늠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말은 타인에게 위로가 될 수는 있는가. 답하자면, 우리는 그저 말로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다. 이 지구의 모든 생명들은 슬프게 우는 짐승들 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히 공감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함께 울 수 있고, 함께 슬퍼할 수는 있다. 저마다 품고 있는 슬픔의 크기로, 곁에 있는 이의 슬픔의 크기를 가늠하며, 온 힘을 다하여 함께 울 수는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타인의 슬픔을 가늠한 결과로 그저 슬퍼하는 이와 함께 울 수 있을 뿐이다. 전력을 다한 슬픔은, 근사한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그저 함께 목놓아 우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함께 울어주는 짐승-animal triste-이 곁에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작은 위로가 된다. 곁에서 나 역시 당신의 슬픔을 알고 있노라며 편협한 논리를 내세우며 싸구려 위로를 건넬 때, 그의 얕은 위로는 위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휘발된다. 하지만, 곁에서 그저 함께 울어줄 때, 그의 존재는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된다. 그의 거대한 존재와 거대한 슬픔만큼이나, 그의 울음 소리는 더없이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위로가 된다. 그러니까, 울고 있는 당신에게, 내가 울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그저, 당신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힘 없는 말 정도 뿐이다. 이예린의 <싸구려 위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곁에서 힘없이 당신이 살아주기를 바란다고 말할 뿐이기에, 이런 위로의 방식을 “싸구려 위로”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런 위로야 말로 가장 고귀한 위로다. 이예린의 <싸구려 위로>는 청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겐, 우리가 있으니까”. 우리, 함께 슬퍼하고, 함께 지쳐버릴 정도로 힘껏 울어버리자. 당신의 슬픔이 고갈될 때까지, 나는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슬픔과 함께 나의 슬픔을 고갈시키겠노라고.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싸구려 위로’라고 칭하지만, 사실 이런 위로가 그 무엇보다 고귀한 위로임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될 것이다. 위로의 본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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