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지만 괜찮아>속 문영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왕자고, 공주라면. 그들에게 바쳐지는 조공으로 세상이 남아나질 않겠지.
세 개의 길
자기계발서에서나 할 법한 달콤한 거짓말들은 집어치우고, 진실을 말해보기로 하자. 날 때부터 왕자와 공주의 운명은 정해져있다. 물론, 전복을 시도하거나 반역을 통해서 운명을 바꾸는 이들도 있지만. 역사는 그들이 떠난 뒤에 그들을 언제나 순혈이 아닌 반역과 배신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그건 역사가들이 후대에 전하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운명을 바꿔 보겠다는 너의 그 노력은 삼일천하(三日天下)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좋게, 운명에 맞춰서 공주와 왕자의 순한 시종과 백성이 되라는.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그렇다면, 왕의 운명을 타고나지 못한 이들에게 선택지는 두 개 뿐인 걸로 보인다. 왕위를 찬탈하거나, 조용히 왕의 백성으로 살아가거나. 물론, 이 두 선택지가 전부는 아니다. 아예 이 문명을 떠나버리는 선택지도 있으니까 말이다.
마녀의 역사
마녀는 그런 존재들이다. 마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황야를 떠돌아 다니는 위험한 인물들로 그려져왔다. 이 마녀들은 중세 유럽이 되면 이교도들을 박해하기 위해 지은 허상의 이름이 되는데, 중세 유럽에선 마녀를 단순히 이교도로만 국한하지 않는다. 미쉘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어보면, 중세 유럽인들은 정신이 이상한 여성들 역시 마녀로 규정하고 그녀들을 박해했다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박해는 잔 다르크를 화형시켰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중세에서 광인을 박해한다는 것은 영지의 바깥으로 추방하는 일을 의미했다. 그리고, 중세 유럽은 마녀가 포함된 정신이상자들을 동시에 신이 들린 어떤 존재들로 규정했다. 그런면에서, 정신이상자들에 대한 감금과 박해는 현시대에 와서 더 심해진 것으로 보이고,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뇌병리학 등 의학이 고도로 발달된 지금 역시 정신이상자들에 대한 처우는 과거보다 더 박한 것처럼 느껴진다. 중세 유럽인들이 그들을 신이 들린 신비로운 존재로 규정하고 추방했던 반면, 우리는 그들을 보호가 필요한 환자로 보고 그들을 ‘감금하고 억압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여기에 재밌는 사실이 숨어있다. 인간의 철학과 이데올로기가 세분화되고, 공고해질수록, 우리가 우리의 이성을 지나치게 믿을수록 그것에 속박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언가에 얽매인다면, 볼 수 없는 어떤 것들이 존재한다. 이 또한, <광기의 역사>에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해보시면 좋을 법하다. 여튼,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고문영은, 예쁜 공주님이 될 바엔 “차라리 예쁜 마녀가 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장면은 <사이코지만 괜찮아>를 대표하는 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예쁜 마녀가 되겠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시녀가 될 바엔 기꺼이 마녀가 될게.
그 의미를 말해볼까? 그 의미를 나는 이렇게 풀어 설명하고 싶다. 문명에 종사하기 위해 선하고 부지런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을 짊어진 집단에서부터 스스로 추방자가 되어, 그 자신만의 색으로 세상을 헤매겠다는 것이다. 물론, 마녀는 예로부터 문명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악적인 존재이고, 괴상한 돌연변이와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시선에서 쓰여졌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본래 공포는 이미지를 왜곡시키는 버릇이 있고, 이런 이야기들은 금기의 역할을 수행한다. 쉽게 말해,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마녀의 추악한 이미지는, 여성이란 문명 안에서 정주하며 살아갈 때에만 아름다울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싶었던 고대인들의 바람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예쁜 마녀”가 되겠다는 것은. 어차피, 공주가 되지 못하고 그저 공주의 선한 시종 노릇을 하게 될 바엔. 그리고 그것을 미덕으로 삼는 이 답답한 문명에서 살아갈 바엔. 이 답답한 이데올로기의 바깥에서 보헤미아로서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거기에 더 나아가, 당신들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과 금기에 얽매이지 않고, 내 스스로 주체적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것이라는 말이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서예지에게서 볼 수 있는 매혹은 바로 그런 매력들 속에 있다. 공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예쁘고 선량했던 아이가, 버려지고, 아이는 스스로 세계로부터의 버림을 선택하고. 세계에서 버려지는 추방자의 삶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이데올로기와 프레임, 금기를 벗어던지고 신비롭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1 화만 보고도 꽤 잘 만든 드라마라는 느낌이 들어 곧 정주행할 예정이다. 좋은 작품을 너무 늦게 보게 되어 마음이 안좋지만, 어쩌면 좋은 시기에 보게 된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요즘 나는 이런 말들이 하고 싶었다. 이 사회가, 그리고 세계가 규정해놓은 어떤 작은 프레임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야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고, 보다 더 개성적이고, 그 개성으로 보다 더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이렇게 스스로를 추방하는 길을 선택한 우리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이방인, 추방자, 아웃사이더, 외톨이, 주변인, 마녀, 보헤미안, 싸이코 등... 하지만 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던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들만의 작고 편협한 프레임속에 우리를 비춰보는 것일 뿐이며, 우리는 프레임에 다 담기지 않아 프레임의 바깥에서 더 큰 존재로. 고고하게 존재하며, 프레임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을 한없이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다.
-<사이코지만 괜찮아>, 2020, TV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