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특별한 롤모델

지하철 할머니

by 날자 이조영

지난 금요일,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글쓰기 코칭 과정 홍보영상을 찍으러 멋을 좀 냈더랬다. 무릎길이의 언밸런스 빨간색 치마에 연한 커피색 민소매 티, 그 위에 티 보다 살짝 연한 색의 긴 셔츠를 허리끈으로 묶고, 색색별 큼직한 보석이 박힌 구두를 신었다. 선글라스 겸 안경도 셔츠 색과 비슷해서 여름에 즐겨 쓰는 것이었다.

건널목에 서 있는데 옆에 서 계시던 할머니께서 불쑥 말을 거신다.


"이대로 나이 먹어요."


처음엔 마스크 때문에 웅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다.


"예?"

"이대로 더 늙지 말라구. 지금 얼마나 예뻐. 늙으면 다 소용없어."

"할머니도 고우신데요, 왜. ㅎㅎㅎ"

"아니야. 옷도 많이 사 입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 국내 여행, 외국 여행도 막 다녀."

"예, 그럴게요."

"늙으면 애들이고 영감이고 다 필요 없어. 애인도 많이 만들어서 이 남자도 만나고 저 남자도 만나."

"예...???"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져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일흔이 넘은 듯 눈가와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어 있다. 목소리는 점점 고조되고 힘이 잔뜩 들어가 한이 느껴진다.


"나이 들면 어딜 맘대로 갈 수가 있나. 사람을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있나.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있나. 돈 많은 것도 필요 없어. 젊을 때 다 해요. 내 말대로 꼭!"


신신당부까지 하신다. 그 사이 초록색으로 신호등이 바뀌었다. 계속 뭐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에게 얼른 건너시라 손으로 제스처를 했다. 할머니는 신호등을 건너면서도 계속 큰소리로 늙으면 소용없다신다.


"예, 감사합니다, 할머니. 조심해서 가세요. ㅎㅎㅎ"


짧은 건널목을 건너 할머니께 웃으며 인사말을 건넨 뒤 지하철로 걸어갔다.

무엇이 그렇게 할머니를 늙어서 한스럽게 만들었을까?

흔히 들었던 노인네들의 푸념이 왠지 그날따라 잔상에 오래 남았다.


'애인 많이 만들어서 이 남자, 저 남자 많이 만나라는 당부는 못 지켜요, 할머니. 저한텐 이미 애인이 있거든요. ㅎㅎㅎㅎ'




30대 때 지하철역에서 한 할머니를 본 적이 있었다. 하얗게 샌 머리를 굵은 브러시로 빗어 넘긴 듯 세련된 헤어스타일. 적당히 살집이 있는 체격은 꼿꼿해서 당당해 보였고, 밝은 핑크색 니트 티에는 가슴 부위에 반짝거리는 스팽글이 달려 있어서 화려했다. 하얀색 긴 바지, 하얀색 에나멜 구두, 하얀색 작은 핸드백. 갈색의 크고 둥그런 선글라스, 그 아래 포인트처럼 콕 찍힌 핑크색 립스틱.

그때까지 본 할머니를 통틀어 제일 세련되고 멋진 할머니였다.


'나도 일흔 되면 저 할머니처럼 하고 다녀야지.'


그날 이후, 그 지하철 할머니는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옷을 자주 사 입는 편은 아니지만, 대충 사지도 않는다. 내 나이보다 10년은 젊게 보이도록 입으려 한다. 피부가 하얘서 쿨톤이 잘 어울리고, 캐주얼한 스타일을 좋아하지만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옷도 즐겨 입는다.

나이가 들수록 옷차림에 신경이 쓰인다. 직업이 있으니 더욱 그렇다. 꼭 정장을 입지 않아도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청바지에 편안한 티 차림을 좋아하는 나는 정장이 너무 불편하다.

9월에는 함께 공부하는 트레이너 두 분과 함께 스타일 컨설팅을 받기로 했다.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뒤 내 모습이 정말 기대된다. ㅎㅎ

친구도 많이 사귀고, 함께 맛집도 찾아다니고, 여행도 다녀야지.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는 삶을 살아야지.


"더, 더 행복해져라! 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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