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나는 매일 베란다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9

<9화> 그날, 우리는 알고 있었다. 더는 미룰 수 없다는 걸

by 예연

그 여름, 나는 매일 베란다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그 여름, 나는 매일 베란다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날, 나는 그를 더 이상 선생님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근처 천변에서 만났다. 평소 오가는 사람들로 번잡하던 천변은 어쩌다 한둘 보일 뿐, 텅 비어 있어서 낯선 공간인 듯 넓어 보였다. 한 편으로 난 작은 길을 함께 걸었다.


우산과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 좋은 엇박자를 만들어냈고, 개천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수면을 어수선하게 했다. 군데군데 고인 웅덩이에는 떨어지는 빗방울의 수만큼 크고 작은 원들이 선율에 맞춰 춤을 추듯 리듬을 탔다. 흥에 겨운 마음에 맞춰 내 발걸음도 리듬을 탔다.


길은 두 사람이 걷기에 충분한 너비였지만, 우산을 들고 걷기에는 넉넉하지 않았다. 그분이 걷는 데 불편할까 봐 최대한 한쪽 길가로 걷고 있는데,


“너 나 싫어하니?"

"네?"

"왜 그렇게 자꾸 나한테서 멀어져?”

“선생님 걸으시는 데 불편하실까 봐…”

그분은 환하게 웃더니 내 팔을 당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금세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서서히 비는 잦아들어 가랑비가 되더니 어느새 그치다시피 했다. 우산을 접어들고 대왕참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제법 굵은 물방울 하나가 내 정수리로 떨어졌다. 흠칫 놀라 두 눈을 질끈 감고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소리 높여 외쳤다.


  “토토로!”


   언젠가 편지에서 애니메이션  < 이웃집의 토토로 >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우산을 받쳐 들고 있다가 토도독하고 우산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재미나서 커다란 몸으로 쿵 하고 땅을 굴러 빗물을 우수수 쏟아지게 하는 장면을 보며 그 순수함에 내 마음이 얼마나 좋았었는지를.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씨익 하고 웃는 듯하더니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무에서 물방울이 우수수수 쏟아져 내렸다. 우린 제법 젖은 서로를 보면서 배를 움켜쥐고 큰소리로 웃고 또 웃었다.


  “우리 저기 건너 봐요.”


순식간에 퍼부은 폭우에 개천의 돌다리가 물에 살짝 잠겨 있었다. 네모 반듯한 흰 돌 위로 흘러가는 물은 얼핏 투명하고 시원해 보였다. 신발을 벗고 첫 번째 돌 위에 발을 딛자 생각보다 물살이 거셌다. 물의 양과 속도가 가늠되는 굉음과 검어진 물빛이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두려운 마음으로 다음 발을 겨우 내디뎠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불현듯 내 손이 따뜻하고 힘이 느껴지는 어떤 것에 붙들렸다. 그의 손이었다.


“놓지 말고 꽉 잡아. 물살이 생각보다 세.”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어릴 적 엄마 손처럼 크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날 밤, 우린 서로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의 웃음기 어린 눈매 속 동공이 내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밤의 한가운데까지 대화를 나누며 끊임없이 웃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편지를 주고받고도 우린 무슨 할 얘기가 그토록 차고 넘쳤을까?


  그의 손을 잡고 있던 그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었는 것을. 이제 우리 사이는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어떻게? 누가? 그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한때 나를 가르친 교사였고, 나이도 나보다 적잖게 많고. 내가 해야 한다.


어떻게?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향한 내 오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식사를 하고 카페를 찾았다. 테이블 위에서 하늘거리는 촛불과 그것을 응시하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순간,


  ‘지금이야. 여기서 내가 고백해야 해. 지금이 바로 그때야.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래야 한다고 하고 있잖아.’


 몇 번인가 대화가 끊기고 틈이 생겼을 때 말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첫마디는 내 입안에 박제라도 당한 듯 도무지 나오지를 않고 애를 태웠다.


결국, 나는 고백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 용기 내서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오래전에 그랬듯 이제는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문자를 보냈다.


  ‘할 말을 못다 하고 돌아서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다울까요?’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패러디한 것이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이형기「낙화」 중)


한참 동안 휴대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창밖 풍경이 점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후회가 밀려왔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던 것일까…. 그를 부담스럽게 한 것일까….  그때, 불현듯 휴대폰이 진동한다. 기계가 만들어낸 그 작은 진동이 온몸을 흔들었다. 심호흡을 한 번 크게 내뱉고, 땀이 밴 손을 겨우 움직여 천천히 폴더를 열어본다.


  ‘아름답지 않다.’


금세 눈물이 스며 올라왔다. 그가 내 마음을 알고 있다. 내 마음을 보여도 괜찮다고 하고 있다.


   고백을 준비해야 했다. 고민을 하던 중 고등학생 시절, 미술 전시회에서 그의 시선을 머무르게 했던 보랏빛 꽃 더미가 생각났다. 그가 근무하는 학교로 보랏빛 꽃을 보내기로 했다. 보랏빛 꽃, 변하지 않는 진심…. 그리고 함께 보낼 메모지에는 별 고민 없이 이 문장을 적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고백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