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나는 매일 베란다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7

<7화> 변치 않는 마음

by 예연

   고입 시험을 치르고 중학교의 마지막 방학을 보내는 동안 그분의 군 생활이 지루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동안 인간과 세상에 대한 경험과 독서, 그분과 서신 교환을 하며 사고의 결이 달라졌다. 좀 더 깊이 있고 정교하게 모양을 갖춰 나가고 있었다. 그에 맞춰 그분의 편지도 읽어 내는 데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어떤 문장에서는 한참을 멈춰 서야 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금세 가까워진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미술반 동아리 생활을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새로운 감각을 깨우며 몰두하게 만들었다.


학교의 가을 축제가 되면 그분은 전시회에 걸린 내 작품을 보기 위해 퇴근 후 늦은 시간에 내가 다니는 학교까지 와주곤 했다.


그분이 오는 날이면 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오래 비웠다. 교문에서 그분이 나타날 때까지 한 곳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초조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키만 비슷해도, 실루엣만 얼핏 비슷해도 발이 내디뎌지려 했다. 그분이 나타날 때까지 내 키는 커졌다가 작아졌다를 계속 반복했다.


마침내 저 멀리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모습이 보이면 수줍은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늘 그리운 그분의 환하게 웃는 모습. 마중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보랏빛 꽃을 한가득 싣고 있는 수레를 그린 내 작품 앞에서 그분은 고개를 오른쪽으로 아주 약간 기울인 채 팔짱을 끼고 오래 머물렀다.


그분의 뒷모습을 한 걸음 뒤에서 쳐다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설렘이 주는 행복감과 부족한 실력에 대한 걱정으로 인한 긴장감이 뒤얽혔다.


 '변치 않는 진심'이라는 보랏빛 꽃의 꽃말이 마음에 가 닿기를 바라며. 그분의 눈높이에 맞춰 같이 그림을 바라봤다.


“아름답네.”


마침내 뒤돌아서서는 웃음이 깃든 눈매로 나를 바라봤다.


계절이 몇 번쯤 우편함을 스쳐 지나갔을까. 어느덧 대학 입시라는 높은 산 앞에 나는 서 있었다. 지원할 학과를 정해야 했다. 때로 어떤 답들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스스로 결정하고자 했다. 


중학생 때, 대학을 다니던 언니 책장에 꽂혀 있던 사회과학 서적의 근현대사에 고무되어 역사를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편 그즈음 화훼단지에서 일을 하던 아버지가 집에 가져오던 화분들이며, 화훼 관련 서적들에 깊이 빠져들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이 끝내 향하고 있는 대상은 다른 무엇도 아니었다. 오로지 그분이었다.


국어 교과를 가르치는 그분. 시를 시보다 더 멋지게 풀어내고, 소설을 소설보다 더 흥미롭게 들려주던 그분. 그 속에서 자기 자신과 인간의 본질, 그리고 세상의 현실을 생각해보게 하던 바로 그분.


그래서 결정했다. 언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하는 국어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운이 좋아 원하던 대학의 국어교육과에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여전한 나만의 비밀이었다. 입학 후 좀 더 어른스러운 글씨체와 철학 용어를 일부러 섞어 넣은 사변적인 내용으로 대학생 티를 내는 편지들을 보냈다.


겨우 교내 지리에 익숙해져서 긴장을 풀고 교정을 다닐 수 있게 됐을 즈음, 그분은 입학을 축하해주고 싶다는 말과 함께 식사 제안을 했다.


둘 만의 식사라니….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날 밤은 잠들 수 없었다. 약속한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구름 위의 나는 더더 높이 떠올랐다.


우리가 마주 앉은 곳은 높은 산 중턱 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온통 푸르름에 둘러싸이고, 한 편에는 우람한 바위가 풍경에 다채로움을 더하고 있었다. 서울에 이런 공기가 느껴지는 곳이 있었구나.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쓸었다.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고, 얇은 치맛단을 흔들어 댔다.


이미 식어 버린 커피를 최대한 조금씩, 입에 대기만 하듯 천천히 마셨다. 이대로 헤어지고 나면 우리가 다시 만날 일 같은 건 없을 텐데…. 아쉬움이 몸을 의자에 붙들어 놓으려 했다. 그분도 마찬가지인 걸까? 커피는 얼마 줄지 않아 보였다.


  “아, 너 아까 그 작가 좋아한다고 했지? 나한테 그 작가 신작이 있어. 다음에 내가 가져다줄게.”

“어, 그래요? 좋아요. 읽어보고 싶었는데 잘 됐어요.”


이런저런 핑계들을 만들어 우리는 몇 번을 더 만날 수 있었다. 읽은 책, 교육 현장, 들썩이는 시사에 대한 이야기들로 언제나 시간은 모자라고 아쉬웠다.


   어느 날 밤, 전화가 와서 받으니 상대방이 말이 없었다. 잘못 걸린 전화인가 싶어 끊으려고 하는데, 문득 흐릿하게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어, 요새 내가 무척 즐겨 듣는 노래인데.


맥박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 곡이 참 좋아졌다고 오직 그분께만 말했었다.


순간, 이전과는 다른 뭔가가 시작되려는가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게 어떤 방향일지는 알지 못한 채.

나는 그 전화를 끊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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