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르는 게 약일까?'
처음 암 진단을 받고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에, 암은 무엇인지, 왜 생긴 건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어요. 뒤늦게 책을 사보고, 검색을 해보았죠. 그렇게 '내 병에 대한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몸에 있는 약 60조 개의 정상적인 세포들은 규칙적으로 자라고, 분열하고, 죽는다. 그러나 돌연변이 암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여 악성 종양을 일으키는 질병을 암이라고 한다.
발병 원인은 흡연, 잘못된 식이 습관, 유전적 요인, 나쁜 생활 습관, 환경적 요인, 바이러스 감염 등 다양하다.'
'난 뭐가 문제였을까?'
공부는 이런 원초적인 질문과 함께 시작되죠. 처음부터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몇 가지 상황들이 용의 선상에 오릅니다.
어린 시절 늘 코가 막혔고 입으로 숨을 쉬었지만 그냥 축농증으로 알고 있었지. 그때 검사를 제대로 받았어야 했나?, 물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는 지적을 자주 받았지. 기름진 음식, 튀긴 음식을 좋아했는데, 햄, 소시지도 좋아했고. 유해 성분이 가득했던 밀폐된 공사 현장에 오래 머물렀던 그날이 문제는 아니었을까?, 혹시 우리 집안에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사업에 매진하던, 과로와 스트레스 가득했던 날들이 암을 유발했던 건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운 과거를 들추다 보면, 그간 자랑스러워하고 즐거웠던 시간까지도 문제로 보입니다. 후회가 되는 일들도 많이 떠오르고, 자책이 이어집니다. 이쯤 되면 더 알아보려는 마음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리죠.
그럴 땐 일단 중지합니다.
알고 싶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한 몇 주간의 시간이 흘러, 안정이 찾아오면 그때 다시 도전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진 않아요.
치료 방법을 알려주는 자료를 접하다 보면, 충격적인 진단을 받은 첫날의 그 당혹스러웠던 기분이 다시 살아납니다. 수술 대기실의 차가운 이동 병상에 누워있던 무기력했던 순간도 떠오르고, 중환자실에서 사지를 헤매는 환자들과 함께 보낸 시간도 생각나고요. 괴로웠던 기억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울적한 마음이 커지죠. 때론 속이 울렁거리고 구토가 나올 것 같기도 해요.
환부를 들춰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병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더 아프다는 걸 느끼며 다시 멈춥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우면 한발 뒤로 물러섰다가 마음이 편해질 때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합니다.
시간이 지나며 터득한 방법은 짧게, 자주 접하는 것이에요.
매주 카톡으로 발송되는 뉴스레터 '아미랑'이나, '명의',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TV 의학 정보 프로그램, 또는 유튜브 등을 활용해 조금씩 쪼개어 암에 대한 지식도 얻고, 다른 암환자들의 사례도 만납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생존을 위한 공부이기에 그만둘 수는 없습니다.
#
조금씩 아픔을 참아가며 학습한 시간이 2년이 다 되어가네요. 이제 내성도 많이 생겼죠.
오늘은 인터넷으로 해외 유명 암 병원을 방문해서 제 암(OLFACTORY NEUROBLASTOMA ; 후각신경아세포종)에 대한 자료를 찾아 나섰습니다. 번역 기능에 감탄해 가며, 이러저러한 정보들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다 그간 궁금했던 걸 하나 발견했네요.
미국의 MD Anderson Cancer Center에서 저와 같은 환자를 지난 10년 간 150명 치료했다는 자료였어요. 매년 약 174,000명의 환자를 진료한다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암 치료 기관에서도 고작 1년에 10여 명이더군요. 암 종류 별로로 매년 수 천명의 암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수치죠. 여기에서도 희귀한 암이었어요.
미국에서조차 치료법이 정립되어 있지 않겠다는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이 병원의 치료 방법이 제가 한국에서 받은 치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안심이 되었고, 대한민국 의료 수준에 대한 '국뽕'도 조금 생겼어요.
이 기분으로 오늘은 이 병원에서 소개하는 수술 과정 영상까지 봤어요.
화면 속에서는 양쪽 콧구멍으로 기다란 기구를 삽입해서 코 속 구조물을 도려내고, 두개저의 뼈를 깨뜨리고 그 속에 있는 암세포를 찾아 잘라내는 장면이 이어졌어요.
제 코 속이 아렸지만 영상을 끝까지 다 봤어요. 장족의 발전입니다.
#
내 병을 공부하는 아픔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용기 내어 공부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죠.
많은 전문가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병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의료진과 더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요. 자신의 상태를 더 명확하게 알 수 있고, 의사의 설명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죠.
재발 방지나 생활 습관 개선에 도움이 되는 정보도 배울 수 있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위험에 처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지요. 그 과정에서 불안감이 줄어드는 효과도 있고요.
#
요즘 저의 진짜 배움은 암에 대한 전문지식 보다도, 여러 매체를 통해 선배 암환우들을 만나는 것이에요.
암을 이겨낸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배워야 할 삶의 태도가 있더라고요.
오늘도 또 한 명을 만났어요. 두 번의 재발과 전이를 겪고도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미국 선배 환자예요.
그는 38세에 후각신경아세포종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지만, 2년 후 재발하여 다시 수술과 양성자 치료를 받아야 했어요. 이 힘든 와중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쌍둥이 아들을 잃는 아픔을 추가로 겪어야 했고요.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2년 후 이번엔 목으로 전이가 되어 또 한 번 수술을 해야 했어요. 그런데 수술 날짜를 잡은 후 허리케인이 덮쳐 집이 무너져 내렸고 이를 수습하고 나서야 세 번째 수술과 양성자 치료를 받았답니다.
대단한 건, 이런 큰 일을 연달아 겪고도 그는 새로 태어난 딸을 키우며 긍정적인 태도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 비결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커피 컵에 적혀있는 문구에 답이 있어요."
"인생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거죠."
� 아픈 걸 잘 참는 편이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