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던 제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가 오랜 시간 공들여 쓴 글이 모두 다 사라져 버렸어요.
이 딱한 사연의 주인공은 패터슨이란 남자입니다. 영화 <패터슨>에서 그는 자기 이름과 같은 미국의 패터슨이란 작은 마을에서 버스 기사로 일하며 매일 같이 노트에 시를 쓰죠.
그는 아내와 반려견이 자고 있는 새벽, 혼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일터로 나갈 때부터, 돌아와 저녁에 잠들 때까지 하루종일 시와 함께 살아갑니다. 묵묵히 버스 운전을 하면서는 시상을 떠올리고, 점심시간에는 공원에 혼자 앉아 도시락을 먹으며 노트에 시를 적어요.
그러던 어느 날 외출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반려견이 그의 시가 담긴 노트를 물어뜯어 갈기갈기 찢어 놓은 걸 발견합니다. 순간 패터슨의 눈빛은 멍해지고, 손은 떨리며, 표정에는 절망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바닥에 뒹구는 노트 쪼가리를 들춰보지만 그 안에 담긴 시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알죠.
예전부터 아내가 복사를 해놓으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미루고 있었죠. 후회스럽고 화도 나지만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컴퓨터에 담아 둔 제 글이 날아가버린 것처럼 안타까왔습니다.
노트를 잃어버린 사람이 모두 패터슨처럼 상실감을 느끼진 않을 겁니다. 사람마다 노트에 대한 가치가 다르니까요.
남들에겐 평범한 것이지만 나에겐 너무나 소중한 것, 그래서 더 애착이 가는 것이 있죠. 그걸 잃는다면, 그 고통은 너무나 크지요. 주변 사람들이 함께 안타까워해 줄 수는 있지만, 그건 '비옷을 입고 샤워하는' 정도의 공감일 뿐입니다.
그 크기는 나만 아는 '주관적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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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수술을 통해, 코로 시작해서 뇌까지 침범한 암세포들을 들어내고 방사선 치료를 받았어요.
그렇게 후각신경 제거와 함께 저의 후각은 사라졌습니다
후각이 없다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있는 건 아니에요.
물론 화재 사고나 가스가 새는 상황을 알아챌 수 없고, 상한 음식을 구분하지 못해서 위험에 처할 수는 있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이니 차치하고 보면, 생활에 큰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몇 가지 불편이 생기지요.
우선 삶이 좀 밋밋해집니다.
여름휴가를 맞아 찾아간 바닷가에서, 강렬한 태양과 드넓은 모래사장 그 사이에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푸른 바다, 이게 진짜 여름이야라며 만끽하려는데, 바다 내음이 빠진 정도,
싱그러운 봄날 수목원에서, 새로 돋아나는 연초록 풀잎, 알록달록 다양한 색상의 꽃들, 눈에는 예쁜 봄이 보이는데, 거기에 향기가 없는 정도죠.
뭐 그런 겁니다. 입체적이어야 할 세상이 좀 평면적으로 바뀌죠.
삶의 재미도 좀 줄어들고요.
커피 볶는 카페에 앉아서도 그 기분 좋은 향을 느끼지 못하고, 베이커리에서는 군침 돌게 만드는 갓 구운 빵 냄새를 맡지 못하고, 그 좋아하던 깻잎, 고수, 바질 같은 향채소들이 다 상추 씹는 맛이 난다거나, 들기름 막국수, 카레라이스 같은 개성 강한 음식이 평범한 국수와 덮밥이 되어버리니까요.
대화에 동참할 수 없어 아쉬울 때가 있기도 하고요.
"어디서 담배 냄새나지 않아?", "향수 향 좋다. 어디서 샀어?", "이 짬뽕 불맛 제대로네" 이런 대화엔 멀뚱멀뚱 있을 수밖에 없죠. 일상 대화에서 냄새가 이렇게 많이 언급된다는 걸 새삼 알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선, 혹시 나에게 입냄새나 땀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먼저 들기도 하고요.
큰 불편이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암 환자가 이런 것을 고통이라고 한다면, '기껏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라고 욕먹을 것 같아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불경죄'가 될까 겁이 나서 아쉬운 마음이 들 때마다 바로 용서를 구하죠.
"아닙니다. 늘 감사하죠. 이만한 게 어딘데요."
이제 향기는 기억 속의 한 조각으로만 남겨 두었어요.
후각은 그냥 제 마음속에 '잃고 나서 알게 된' 소중한 것으로 간직하고 말죠.
많은 암 환우분들도 각기 다른 상실을 겪고 있을 겁니다.
유방 같은 신체의 일부를 절제했다거나, 위, 대장 등의 기능 일부가 제약된다거나 또는 폐 같은 장기 일부 기능이 마비되어 기계 장치를 달고 있어야 한다거나 저 보다 훨씬 큰 아픔을 견디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죠.
암 환자뿐 아니라, 누구나 이런 고통이 한두 개씩은 있는 걸로 압니다.
많은 분들이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각양각색의 아픔을 가슴 한편에 숨긴 채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저도 그냥, 내가 혼자 품어야 할 '주관적인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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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에 패터슨은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요.
공원에서 일본 시인과 우연히 만난 후 심경의 변화가 생긴 덕이예요.
그 일본인은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존경하기에 그의 시집 <패터슨>을 들고, 그가 살던 도시 패터슨을 찾아왔어요. '저는 시로 숨을 쉽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시인은 패터슨과 시에 대한 짧은 대화를 나누고 떠나며 빈 노트를 선물합니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라는 말과 함께.
이 만남을 계기로 패터슨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펜을 들어요.
그렇게 상실로 텅 비어버린 페이지를 새로운 시로 채워 넣어 갑니다.
패터슨도 알고 저도 압니다. 사실 우리 모두 알고 있죠.
나의 주관적 고통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걸, 결국 나 스스로 치유해야 할 문제라는 걸 압니다.
한번 잃어버린 상실은 돌이킬 수 없다는 걸,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걸 압니다.
패터슨은 믿었을 겁니다.
'다시 똑같은 시를 쓸 수는 없지만, 더 좋은 시를 쓸 수는 있다.'라고.
저도 믿어보려 합니다.
'후각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다른 감각을 키워 세상을 더 잘 만끽할 수 있다'라고.
그렇게 주관적 고통도 이겨내고, 상실도 메워가면서 가던 길을 계속 가보려 합니다.
� 여러분은 어떤 상실을 경험해 보셨나요?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새롭게 채워 넣으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