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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꽁커리어 Dec 26. 2020

버르장머리 없는(?) 고객

‘네가 그럴 줄 몰랐다’는 넋두리를 하지 않으려면

YS정권때 일본의 도발적 망언이 극에 달했을 때

일본에 대해 YS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는 발언이 구설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당시 외교적 분쟁까지 우려하는 예의바른(?) 언론의 유난도 있었지만

격앙된 국민감정을 누그러뜨리는데 그만한 약발은 없었던 것 같다.


시내 모 패밀리레스토랑. 가족단위 손님이 많아 간혹 공공장소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조심을 몰랐던 아이들의 천방지축으로 다른 손님들이 불편해하자 그 음식점 업주는 안내문을 내걸었다.

“식당 홀에서 동반한 어린이들이 뛰어다니거나 소란을 피우면 그 가족들까지 정중히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물론 득달같이 가족단위 손님들은 불편한 반응들을 쏟아냈고, 손주를 앞세운 세련된 할머니와 일부 가족분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다.

홀안의 다른 손님들은 물론 문밖 대기석에서 기다리던 손님들까지 발길을 돌리지 않을지, SNS를 통한 불매운동까지 벌어질 분위기였지만 이후 상황이 꼭 그렇게 가진 않았다. 다음 주말부터는 아이들을 동반하지 않는 부부, 친구, 연인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가족, 단체모임 중심의 대형 레스토랑으로 인식해 그동안 식당을 찾지 않았던 잠재고객들이 더욱 몰려들었던 것이다.


코로나 19에 의한 3차 재확산으로 모두가 거의 멈춤상태다.

한 편의점에서 음식을 구입하고 바로 먹고있던 손님에게 내부에서 음식섭취는 안된다고 지적한 편의점 직원에게 그 손님은 먹던 음식을 집어던지는 행패를 부렸단다.

그 버르장머리 없는 손님의 정서상태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배고파서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고픈데 그걸 못먹게 하나?”

“고작 편의점 알바나 하는 주제에 감히 내 먹거리를 제지하고 참견을 하나?”

그 어떤 배경에서든 그 손님은 평소 인정받고 존중받아보지 못한 사람이었으리라


학창시절 갈비 전문 대형식당(OO회관이었던 것 같다.)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때다.

당시 그 식당 홀써빙 누님과 손님이 크게 다툰 일이 있었다. 나중에는 그 누님이 항의손님의 치욕스러운 육두문자까지 들으며 일방적으로 깨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메인 갈비요리를 수십 인분 주문했던 단체팀이었는데 그날 좋은 일이 있었던 손님에게 누군가 홀써빙 누님에게 술 한잔 따라보라는 요구를 했던 것. 

홀써빙 연차는 중간급이었지만 홀 관리와 일처리가 똑 부러져서 홀 운영을 실질적으로 주관해오던 그 누님도 당혹스럽다 못해 거의 무너져 내린 얼굴이었다.

급히 들어선 우리 사장님. 이미 대충 상황은 전해 듣고 오셨을 터.

“오구 오구 우리 김 부회장님, 최 감사님도 오랜만이네요. 오랜만에 걸음 하셨는데, 이를 우짭니까?

단체팀의 주빈인 듯한 분이 뒷 춤의 손수선을 꺼내 입을 닦으면서 사장님 앞으로 나선다

“단골손님들을 이리 막대하면 쓰나, 박사장도 형편이 피어 배가 부른 건가, 아님 사람교육을 어째 이따위밖에 안되는가?”

“네 그러게요. 부회장님. 그래서 말인데요 우리 김 매니저에게 똑디히 사과하시고 조용히 나가 주십시오. 여기 CCTV나 직원들 눈이 옛날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 김 매니저가 이 홀의 책임자입니다. 해서 음식값은 안 받겠습니다. 대신 확실하게 사과하시고 자리 끝내주시죠”  


인정받고 존중받는 사람은 어느 누구를 폄하하거나 함부로 막대하지 않은 법이다.

더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존감과 믿음을 굳건히 다져간다. 스스로 소중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비즈니스 조직처럼 ‘선택’과 ‘집중’까지는 아니어도 전체를 아우르는 ‘전가의 보도’ 같은 해법은 없다.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분야에서 탁월함을 발휘할 수도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꼭 해내야만 하는 일, 포기해야 할 부분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멋지게 해내는 것이 중요할 뿐, 주변 누군가의 평가와 인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자신에게 충만했고 자신만의 판단과 의지로 끝까지 해냈으면 그만이다. 모든 이에게 완벽한 사람으로 기억될 필요도 없으니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고 누구에게나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은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명확해진다. 

철저히 세분화되고 정교하게 고객층이 타기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좁혀진 고객들에게도 무결점 서비스는 불가하다. 다만 진정성과 일관성이다. 최고의 고객 서비스를 위해서는 일부 버르장머리 없는(?) 고객에게도 바른 소리 해야 한다. 그래야 나서지 않은 다수 고객들에게 보편타당한 지지와 암묵적 믿음을 튼실히 쌓을 수 있고, 고객 컴플레인을 제대로 대응해야 그들의 진짜 욕구를 알게 되는 이치가 지금도 유효해서다.


정말 친한 친구에게는 ‘이래서 서운했다.’, ‘그 말이 너무 불편했다.’ 분명히 얘기해주어야 하고, 아끼는 후배에게도 따끔한 질책과 미흡한 부분을 직면시켜주는 악역도 자처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에게도 무조건 이해하고 넘어가기보다는 아픈 지적과 불편하게 느껴지는 당부도 해야 한다. 

그것이 부지런한 마음 씀씀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음 챙김이겠다.

주변의 소중한 인연 들일수록 더 그래야 한다.

‘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럴 줄 몰랐다’는 넋두리를 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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