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모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두리e Nov 24. 2023

11 m×6m의 너른 빈터

단순함 속에 잠시 머물기

핏물을 우려낸 양지사태를 넉넉하게 부은 물에 푹 담근다. 잡내를 잡기 위해 먹다 남은 소주와 냉장고 문에 콕 처박혀 있어 존재를 자주 까먹는 로즈마리 잎 두어 개도 넣어준다. 부드럽게 조리되는 동안 알배추 두 덩이를 먹기 좋게 썰고 부추도 한 움큼 씻어  잘게 자른 다음 보관통에 담는다. 익혀진 수육은 얇게 슬라이스를 하고 육수는 깔끔하게 걸러 간을 맞춰 둔다. 파와 마늘을 잘게 다지고 시판되는 폰즈 소스와 유자청을 곁들여 달짝지근한 소스도 마련한다. 캠핑에는 물어묵 꼬지가 지면 심심할 터, 네모난 어묵을 반으로 접어 기다란 꼬챙이에  엇갈리게 꽂아 어묵 꼬지를 만들고 보니 별 거 없지만 풍성한 느낌에 압도당한다.


먹거리를 준비하고 나니 일요일 오후 3시다. 남편이 도와주었음에도 손이 빠르지 못하니 시간이 벌써 그리 되었다.  엘리베이터로 짐을 모두 옮겨 싣고 다시 자동차 트렁크로 짐을 옮기는 데만 해도 중년의 부부는 숨이 차다. 이럴 때는 아들 녀석들 도움의 손이 아쉽다.


대구를 빠져나와 경주로 접어드는 고속도로는 한산하다. 사실 지금 이 시간이면 대구로 들어가는 반대편 차량은 꽤 밀려있다. 박주상과 나는 이 시간에 나오길 잘했다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볼륨을 한껏 올리고서 입 꼬리를 씰룩 실룩 거린다.  어느덧 경주다. 보문단지를 지나고  석굴암의 이정표도 곁눈으로 흘러 보내면  바다가 슬쩍슬쩍 손짓을 하는 감포로 접어든다.


보통 10월은 낮에는 한여름의 무더위와 밤에는 서늘한 바람이 교차하는 종잡을 수 없는 달이다. 아침이면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정오 무렵에는  따가운 햇빛이 점령하지만 거대한 장막 같은 하얀 구름이 몰려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기도 한다. 해가 질 무렵에는 구름은 사라지고  석양빛이 스며들며 샤워를 하게 만든다.


캠핑장에 도착하니, 햇살은 한편으로 기울어져  마지막 남은 눈부심을 쏟아내고 있다. 편도 일 차선 도로를 양쪽에 끼고 각자의 기개를 자랑하듯 자유롭게 뻗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머리 위로 쏟아지고 짙은 낙엽 색깔의 솔방울은 살이 올라있으며, 나뭇잎, 잎사귀, 이 모든 것이 햇볕을 받아 촉촉한 흙냄새와 하나로 어우러져있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우린 사이트를 정비해야 했다. 아이보리 색깔의 감성 캠핑 의자를 꺼내고 나무 테이블을 펼친다. 감성 캠핑을 위해 준비한 것들인데 너무 무겁다. 차의 뒷좌석을 눕히고 매트리스에 바람을 넣는다. 탄탄하게 차오른 매트리스를 나란히 누운 의자 위에  올려놓고 침낭을 펼쳐놓으면 잠자리는  일단 완성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중년부부가 과연 노련하게, 손발 척척 맞아가며 했을까?

 

"폴대를 제대로 좀 잡고 있어 보라니까"

"제대로 잡고 있다니깐, 그렇게 안 보여?"


"그건 잠시 내려놓고 이 쪽으로 오라고"

"어떻게 이렇게 내려놓으면 되는 건가?"

"아놔  다 빠졌잖아!"


"테이블을 어떻게 펼쳤더라? 할 때마다 모르겠네"

"혼자 연구 함 해보셔"


"아!! 텐트가 먼저 들어가야 되는데 타프부터 쳤어"

"그럼, 다시 걷어? 말어?"


덤 앤 더머가 따로 없다고 박주상은 늘 말한다.


그래도 우린 늘 해낸다. 잘 해낸다. 시간이 걸릴 뿐이다. 낮은 직사각형 코펠에 미리 준비한  육수,  슬라이스 한 수육과 노란 알배추와 초록의 부추를 한꺼번에 밀어 넣는다. 유자 폰즈 소스에 푹 찍어 먹으니 담백한 사태의 맛과 달짝한 배추내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유자향이 향긋하다.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고기 한 점 먹는 사이 이미 주위는 어둠이 짙게 려있다. 옆 캠퍼들의 간간이 들려오는 나직한 말소리, 밤을 밝히는 레트로 감성의 노란 랜턴 불빛들, 어디선가 저녁거리로 굽고 있는 삼겹살의 지글거리는 소리, 탁자 위 자그마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악동 뮤지션감성 멜로디, 사진 한 장 찍어 자취방에 홀로 있을 아들에게 얼른 보낸다.


밤 사이 영화 두 작품을 보고 늦게 잠들었음에도 아침 일찍 눈이 떠지는 것은, 차의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 때문만은 아니리라.


어젯밤만 해도 짐이 한가득이었던 야전 침대 위에서  햇빛에 따뜻해진 몸으로 오랫동안 무기력하게 그 자리에 누워 있어도 본다. 그때 내 두 눈과 자그마한 새 사이로 검정 슬리퍼를 신은 남자의 발이 나타났다.

어서 짐을 정리하고 경주 시내로 놀러 가자고 박주상은 서두르라고 재촉한다.


우리가 떠나면  이 터에 누가 잠시 머물다 갔는지 조차 모를 만큼 깔끔하게 정리를 한다.

 

먹고 자고 자연을 흡입하고 음악을 듣고 단순함을 추구하다 또 일상으로 돌아간다.

11 m×6m 의 공간은 내게 주는 너른 빈터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90만원 짜리 암체어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