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5화 _ 이런 사람이라면 괜찮을 수도... ]
[ 쾅!!! ]
"앗 깜짝이야!!!"
발자국 소리에 이어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소리.
낡은 문고리와 경첩 탓에 여닫힐 적마다 신경질 적인 소음을 내는 출입문 쪽이었다.
해인은 깜짝 놀라 그만 그리던 붓을 떨어뜨렸다.
"앗, 해인씨, 늦었는데 안 갔네... 놀랬어요? 미안해요...!!"
밤샘 작업을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러 갔던 외국인 화가 한 명이 다시 작업실에 나온 모양이었다.
스웨덴 사람이라 자신을 소개했던 이 화가의 이름은 [ 안톤 ]이었다.
"엇, 해인씨, 그림 새로운 거 다시 시작했나 보네요?
오...! 보통 아마추어 화가들, 결과는 어떻게든 만들어도, 과정에서 헤매는 경우가 많은데
해인씬 과정이 참 정석대로 가는 것 같네요."
"앗, 정말요? 감사합니다!!"
해인이 그리고 있는 그림을 보며 가벼운 코멘트를 전달한 후 본인의 자리로 가 앉은 안톤.
전 날 카와모토가 이야기 했던, 갤러리에 출품할 그림을 완성 했다던 화가들 중 한 명이었다.
"아, 완성하신 그림이요, 갤러리에 연락해서 매물로 전시 처리 했고요, 블로그에도 추가 했어요.
전시 개시는 그림 좀 더 모이고 나면 진행하게 열흘 후 정도 생각 하는 것 같더라고요."
"아, 예...! 수고했어요, 해인씨, 휴우..."
며칠 동안을 작업해 오던 기존 그림이 완성되어 새로 진행할 다음 작업에 고민이라도 있는 건지, 안톤은 이야기 끝에 큰 한 숨을 덧붙였다.
"화가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예상치 못했던 한숨 소리를 들은 해인이 안톤에게 물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근심거리를 들키기라도 한 듯,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
"아, 하하...이런... 나도 모르게 그만 한 숨이 나와 버렸네요...!"
"??"
"예술이란 정말 고독한 작업이죠? 하하...
그림을 진행하고 있을 땐 나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이 좋은데,
현실로 돌아오면 이렇게 갑자기 계속해서 인식 못하던 걱정들이 한 번에 확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특히 뭐 하나 완성하고 나면 문득 이런 박탈감이 찾아오죠...!"
"아... 그건 완성 후에 찾아오는 일종의...
허무함 같은 건가요?"
"뭐, 비슷하겠죠? 잠깐 도피해 있다가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음..."
해인으로선 그렇게나 꿈꾸어 오던 환상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생활 중인데,
그 안에 아직 겪지 못한 이면이 있었던 건지...
아직까지는 공감할 수 없는 이 '작업 후에 허무함'에 대해 해인은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었다.
[ RRRRR~ ]
잠깐의 어색한 정적을 깨고 안톤의 휴대폰이 울려댔다.
"여보세요? 음, 아들? 왜? 아빠 작업 중인데,
오, 그랬어? 잘했네...! 맛있는 거 사줘야 겠다.
음 그래, 이따가 봐."
의도치 않게 안톤의 통화 내용을 엿 듣게 된 해인.
"아들이... 있으신가 봐요?"
"아, 예 6살 박이 아들 하나 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거에 대해 얘기 한 적이 없네요.
카와모토 빼고 나머지 화가들은 다 결혼해서 가정이 있는 친구들이에요."
"아, 정말요? 전혀 몰랐네!!"
"후후, 왜요? 다들 유부남 같이 안보여서요? "
"하핫, 뭐 그런 거 보다 아무래도 작업실에서 워낙에 자유롭게 작업하시는 모습들이..."
"... 가정을 꾸리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 같지는 않다?"
"아, 뭐... 예..."
안톤은 이젤에 새로운 종이를 끼우고 새 작업의 준비를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했다.
"흠, 그것 때문에 걱정이 많죠...!
가족을 챙겨야 하는데 이래저래 작품 구상이네, 작업이네 하며... 같이 잘 있어주지도 못하고...
뭐 돈이 잘 벌리기나 하면 다행인데 요즘은 또 썩 그런 거 같지도 않으니...”
“... 그렇죠... 뭐 어디나 힘든 점은...”
“하다못해... 시간도 시간이지만 재료비며, 임대료며... 각종 들어가는 투자해야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보니까 부담이 많이 되요...”
금전적인 문제.
특히 작업 비용에 관련된 얘기를 듣자 해인은 전 날 작업실에 잠깐 들렀을 때 밖에서 얼핏 들린,
임대료에 관련된 이야기로 화가들의 고성이 오갔던 사실이 기억났다.
그리고 아마도 기억 속 고성의 주인공은 눈앞의 안톤과 카와모토.
현재는 자신이 이곳의 사무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만큼, 비용 문제의 변화라면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듯 해, 그 부분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저, 사실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어제 잠깐 왔다가 임대료 문제로 다투시는 것 들었어요.
임대료가 더 오르나요? 제가 정리해 본 바론 몇 달 간격으로 조금씩 올랐던 것 같던데...”
“아, 여기 사무일 봐주시고 계시니까 알만큼 다 아시겠구나...
사실 이 작업실 프로젝트 시작을 저하고 카와모토가 같이 했었어요.
뭐, 다른 나라에서 작업실 얻어서 그림 작업하는 게 쉬운 게 아니니까 서로 분담을 했었죠.
처음에 여기 올 땐 카와모토가 여기 건물주랑 아는 사이라고, 다른 데 보다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면서 이곳으로 정했었어요... 근데..."
[ 끼이이익...! ]
대화에 빠져 두 사람 모두 누군가가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
갑작스럽게 출입문이 열리고 카와모토가 들어왔다.
“해인씨, 아직 있었네요? 계속 그림 그리고 있었구나...”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끊겨버린 대화.
화실 내에는 약간의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여, 안톤. 넌 간만에 그림 완성했는데,
왜 좀 쉬지 않고?”
“음, 그냥 뭐, 달리 할 것도 없고 해서...”
형식적으로 한마디 건낸듯한 짧은 대화를 마친 후, 자신의 그림 위치로 이동해 진행 중이던 그림을 마저 그리기 시작하는 카와모토.
원래부터 이곳 화가들은 각자 작화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이야기를 섞는 일이 잘 없기도 했지만,
없는 자리에서 뒷 담화를 하고, 만나서 이렇게 어색한 걸 보니, 아직 어제의 다툼 끝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뻔히 알게 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림만 그리고 있자니 해인 역시도 조금씩 집중력이 떨어지는 듯 했다.
“예, 저는 그럼... 이만 가볼게요.
갤러리 연결 끝났고요, 필요하신 비품 있으시면 나중에 한꺼번에 사오려고 하니까, 이 양식에 적어주세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래요, 잘 들어가요. 해인 씨 수고했어요.”
이 서로 불편해 보이는 두 남자를 두고 나오면 이 후엔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해인은 일단 후퇴를 선택했다.
밤 10시가 가까운 시각.
해인은 작업실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세현이 일하는 카페를 발견하였다.
폐점시간인지 정리에 분주한 모습.
해인은 일부러 속도를 낮추어 눈치를 살피며 밖에서 보이는 카페 내부를 살폈다.
“세현인 오늘 먼저 들어갔어요...!
근무시간을... 그냥 알려드릴까?”
새삼 들려온 한국말에 깜짝 놀라는 해인.
뒤를 돌아보니 바깥 쪽 테라스를 정리하고 있던 카페 주인아저씨가 해인을 알아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여기 주인도 한국분이셨지...”
“반가워요, 저 작업실에 새로 들어온 여자 분이죠? 우리 세현이랑도 알고...”
“예, 예... 인사가 늦었네요. 이해인이라고 합니다. 서울에서 왔어요.”
“음, 그래요... 지금 세현이랑... 같이 살고 있는 건 아니죠?”
“아니, 아니요!!!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냥 동네 주민이에요!! 여기서 만난!!”
“음, 그렇구나...
이상하게 자꾸만 서로 찾는 장면만 목격을 해서... 그런 줄 알았지 난...!”
“절 찾아요? 세현씨 가요?”
“뭐 저번엔 해인 양 기다리려던 건 지,
시키지 않은 야근까지 하던데요, 뭐.. 끝나고 같이 가지 않았어요? 좋을 때다 싶어서...
근데 아직 여자 분은 별 생각 없는 모양이구나...! 쯧쯧...!! 그 허우대를 해 가지고...!"
“무슨... 별 생각이...!! 아, 안녕히 계세요 그럼!!”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후다닥 자리를 뜨는 해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해보려 했다.
원치는 않았지만, 꿈을 찾아 멀리 떠나 온 과정 과정마다 늘 따라다닌 세현의 존재.
심지어 지금은 그가 만들었다는 소설의 이미지를 재현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뭔가...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였다.
가족을 위해 오랫동안 적성에 맞지도 않은, 하기도 싫은 일을 해오며, 이래저래 뒷바라지만을 책임지던 해인에게 ‘연애’ 감정은 사치였다.
어쩌면, 사치라고 생각하게끔 정신이 그녀를 지배했음이 분명했다.
[ 네가 지금 그럴 때냐고... ]
심지어는 대부분이 즐거웠을 대학시절 조차 해인에겐 그저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어느 순간의 깨달음에 일상을 탈출해 나온 해인에겐 이런 쓸데없는 관념들 역시 깨부수어야만 할 과제들이었다.
[ 가만... 그러고 보니... 그런 감정 좀 가지면 어때? 집까지 뛰쳐나온 마당에... ]
은연중에 생겨난 아영 식의 무대포 정신을 누군가에게 증명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왜인지, 이 사람한테는 그래도 될 것 같다는.
어느 새 집에 도착한 해인.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가게 아저씨의 쓸데없는(?) 오지랖은 해인을 더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신경쓰이는 앞 집 남자...
정황을 살피려 해인은 지난번처럼 창문을 열고 얼굴만 빠꼼히 내밀었다.
[끼이이익...]
‘젠장, 시끄럽다고!!!’
여전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리는 창문.
“뻐꾹!!”
“어멋! 깜짝이야!!”
창문소리를 들은 건지, 다 열리기도 전에 벌컥 자신도 창문을 열어 얼굴만 내민 해인을 놀리는 세현.
“이거 봐, 또 저러고 얼굴만 내밀고 있어, 나한테 뭐 할 말 있죠...!!? 해인씨?”
“아, 아니...! 창문 연 게 죈가?!! 환... 환기 좀 합시다. 환기...!! 내가 무...무슨 할 말이 있어요!!”
“소설 고칠 부분... 말해주기로 했잖아요!! 그 길지도 소설가지고 참...!!”
“아...아직 다시 못 봤어요!!”
“그래요? 음... 너무 서둘렀나...
암튼 오케이... 그럼 수고!!”
자기 할 말만 뱉어놓고 창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세현. 순식간에 벌어진 해프닝에 해인은 당황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에이...얘기 할 때보면 참, 이마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
[끼이익!]
“아, 해인 씨, 또 밥도 안 먹고 그림만 그리다 왔죠? 이거나 먹어요!”
불쑥 창문을 다시 열고 해인의 창가 쪽으로 봉지에 든 무언가를 던지는 세현.
엉겁결에 해인이 받은 것은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빵이었다.
“에? 이...이거...뭐...”
통찰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어디 CCTV라도 달아놓고 자신을 감시하는 건지,
해인의 일상을 꽤 뚫고 있는 듯한 세현.
늦은 시각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무언가 챙겨 먹으려던 차. 받아든 봉지에 든 빵을 꺼내자 향긋한 빵의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 동네도 나름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게 된 해인은 이 빵이 동네의 흔한 빵집에서 살 수 있는 퀄리티는 아님을 단번에 알아챘다.
더군다나 따끈따하게 데워진...
언제 올 줄 알고 이런 걸 준비해 두었던 건지.
해인은 여전히 뭔가 속고 있다는 생각으로 빵을 먹으며 세현의 소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자기소설 읽어달라고 자기가 만든 세계를 머릿속에 주입시키더니,
자꾸자꾸 맴도는 그 이미지를 구현 해 보겠다고 하루 종일 작업하게 만들고,
이제 돌아왔나 싶었더니 빵 주면서 다시 읽으라고 시키는...
세현은 분명 숙련된 기술로 해인을 조련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녀 관계를 잘 아는 고수임에 틀림없다.
어리바리한 한 여자만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방문하셔서 응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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