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살다 보면 별다른 수고를 하지 않았는데 예상 밖으로 일이 술술 잘 풀릴 때가 있다. 나를 비롯한 동준의 친구들은 그를 추모할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다. 가장 많이 나왔던 아이디어 중에 하나는 기부금을 모아서 임동준 상(賞)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에 우리들의 신분은 레지던트였기 때문에 내과학 교실 이름으로 나가는 상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은 커녕 동준을 추모하기 위해서 의과대학 안에 심어놓은 나무도 관리가 잘 안 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동준이 죽은 지 15년 만에 내과학 교실에서는 그 해 가장 뛰어난 레지던트에게 주는 임동준 상을 제정했다. 내과 교수가 된 친구들이 오랜 시간 동안 노력한 결과였다. 그날 기념식에서 추모의 글을 읽었다. 동준의 어머니가 기념식에 왔다. 동준은 어머니를 많이 닮았는데 어머니의 표정 속에는 항상 어두움과 애써 밝아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공존했다. 기념식이 끝나고 참석자들이 저녁을 먹으러 병원 내 식당으로 갔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무척이나 반가워하면서 내 손을 꼭 쥐었다. 자주 찾아 봬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죄송스러웠다.
동준이 죽은 후 삼 년 째 까지는 시간이 되는 친구들이 모여서 기일(忌日)마다 어머님을 찾아 뵀지만 이후로는 그러지 못했다. 어머니는 정작 사고를 낸 운전사는 손목뼈만 부러졌다는데 당신의 아들은 왜 죽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탄식을 하곤 했다. 우리를 볼 때마다 잊으려고 노력했던 막내아들이 생각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는 어머니의 말이 맘에 걸렸다. 당신은 아들의 죽음을 잊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우린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방해를 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 후로 언젠가부터 기일에 동준의 나무가 있는 곳에 들르는 것으로 어머니를 찾아 봬는 것을 대신했다. 그마저도 다른 병원에서 일하게 되면서 드문드문 하게 됐지만.
어머니는 손을 식탁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왼손으로 오른손을 계속 주물렀다. 이유를 여쭤보니 몇 달 전부터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에 감각이 무뎌지고 통증이 있다고 했다. 손목터널 증후군이었다. 정형외과에서 수술하자는 얘기를 들었지만 망설이고 있다고 했다. 저녁식사 자리가 끝나고 연극반 선후배들과 함께 근처에서 맥주를 몇 잔 더 마시고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어머니의 손목통증이 맘에 걸렸지만 딱히 내가 할 역할이 떠오르지 않았다. 동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어떻게든 수술을 받도록 설득했으리라. 공교롭게도 그날 집으로 오는 길에 사고가 났던 그 터널을 지나왔다. 손목뼈, 손목, 통증, 터널, 묘하게도 이 단어들 속에는 어떤 연관이 있다. 어머니의 ‘손목 · 터널 · 증후군’이 마치 브리아나 라이넥의 추모비에 새겨져 있던 ‘브리지’와 숫자 ‘00’처럼 동준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서 어머님의 몸속에 아로새겨진 단어들처럼 느껴졌다.
나와 아내는 한국으로 돌아 온 후에도 자주 롱아일랜드 멜빌의 우리 집을 떠올리곤 했다. 자운대를 그리워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이었다. 그건 아마도 멜빌이 자운대처럼 마음먹는다고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갈 수 없는 곳은 갈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립다. 일 년 만에 한국에 와서 TV를 보니 오디션 열풍은 어느덧 시들해졌고 온통 가족과 요리에 대한 프로그램들로 가득했다.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토론을 하기도 했고, 아빠가 아이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으로 여행을 떠났다. 토론은 무의미한 반복으로 채워진 부조리극 같았고, 시도 때도 없이 떠나는 화면 속의 여행은 멀쩡한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에겐 현실성 제로의 판타지처럼 보였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여기저기서 요리사들이 자주 출연했다. TV 속에 나오는 요리사들을 보면서 가끔씩 전남 보성 시골에서 요리를 너무 배우고 싶어서 뉴욕 요리학교에 유학왔다고 했던 짧은 머리의 청년을 떠올렸다. 학교를 졸업하면 뉴욕의 레스토랑에서 인턴쉽을 할 거라는 얘길 들었던 게 기억났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와 아내는 미국 동부로 갈 일이 생기면 롱아일랜드를 꼭 들러보고 싶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서비스로드를 타고 옷세고 파크도 가보고, 110번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해변도 구경하고, 좋은이웃 교회에 들러서 예배도 보고, 교인들도 만나고. 하지만 이제는 그곳에 가도 더 이상 우리를 맞아줄 사람이 없으리라. 2014년 4월 좋은이웃 교회 목사님이 아버님의 팔순 생신 때문에 한국에 왔다가 우리 집에 들렀다. 목사님은 십 년 동안 있었던 좋은이웃 교회를 떠나 조만간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한인교회로 옮길 계획이라고 했다. 목사님이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허 집사님도 목사님이 계신 교회 근처로 이사를 갔다. 좋은이웃 교회에는 새로운 목사님이 왔고 교회도 헌팅턴이 아닌 우드버리(Woodbury)로 이사했다. 마치 연극이 끝나고 무대가 치워지듯이 우리 가족이 그곳을 떠난 후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서 교회도, 목사님도, 이웃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제는 그곳에 간다 한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모두가 떠나 버린 텅 빈 무대뿐이리라. 추억이 깃든 무대가 사라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이 일 년만 더 늦게 그곳에 도착했어도 우린 아무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또는 우연하게도 이 모든 일들은 우리가 그곳을 떠난 뒤에 일어났다. 그렇다, 우연하게도!
도미니카에 가기 전까지 내게 믿음이란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관수를 감화시켰던 갈릴리 해변의 바위와 윤경환의 아버지를 살린 산소통 때문에 내 생각은 바뀌었다. 믿음이란 아무 것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우연히 성지순례를 가게 되고, 우연히 갈릴리 호숫가를 걷게 되고, 우연히 바위를 보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는 일이, 또는 우연히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우연히 산소통으로 교회 종을 치게 되고, 우연히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가게 되는 일이 두 사람에게는 크리스찬이 되고 목사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믿음이란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우연을 의심하는 것이다. 우연을 우연으로 넘기지 않는 것, 우연 속에서 필연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 두 사람에게 일어났던 우연의 연쇄들이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었듯 내게 일어났던 우연도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렴풋하게나마 지금까지 내게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이 ‘우연’이 아닌 누군가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믿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믿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아내는 누리의 치료 환경을 바꿔 주기로 했다. 가장 큰 변화는 다니던 병원을 바꾼 것이다. 뉴로피드백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치료 반응이 좋으면 약 용량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누리가 먹는 약은 식욕을 떨어뜨리고 기분을 지나치게 가라앉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누리는 점심을 거의 먹지 않았고 약을 먹는 동안에는 기분의 변화가 심했다. 조금 느리지만 우주처럼 누리도 성장과 발달을 겪고 있다. 키가 조금 더 컸고 목소리가 굵어졌고 콧수염이 나기 시작했다. 누리도 사춘기를 느리게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서 나와 아내가 우주의 야구 실력 때문에 놀랐다면 한국에서는 누리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누리는 한국에 와서 놀라운 속도로 영어가 늘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누리의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른다. 왜냐하면 누리는 오래 전에 이미 우리 부부의 영어실력을 훌쩍 넘어섰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이었다. 당시에 아내는 영어 학습용으로 DVD를 빌려 오곤 했다. 하루는 <풀하우스>를 틀어 놓고 있었는데, TV 화면을 등지고 밥을 먹던 누리가 혼자서 키득키득 웃었다. 누리에게 왜 웃는지를 물어보니 아빠는 키미의 저 말이 웃기지 않느냐며 내 질문이 너무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에 갑자기 중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게 된 호주 청년 맥마흔처럼 누리의 영어는 놀랍고 급작스러웠다.
누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를 한 번 더 놀라게 만들었다. 누리가 그린 그림 때문이었다. 2016년 한국의 여름은 무덥고 끈질겼다. 여름 방학 내내 누리는 푹푹 찌는 거실의 노트북 앞에 앉아서 마우스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렸다. 누리의 그림 속에 나온 캐릭터들은 부서진 안드로이드와 괴물들이었는데 이들의 모습은 내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독특한 형태였다. 아마도 러브크래프트의 코스믹호러 에 등장하는 괴생명체들이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누리의 그림 속에는 우울과 그로테스크함이 공존했다. 그림 속에서 보이는 우울의 정서가 누리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맘에 걸렸지만 그림 자체는 놀라웠다. 놀라울 정도로 섬세했고, 놀라울 정도로 그로테스크했다.
누리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처럼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서 하루 종일 집에서 지냈다. 누리는 숨겨진 재능으로 우리 부부를 놀래고 기쁘게 했지만 여전히 학교생활은 서툴렀다. 여전히 친구를 사귀지 못했고,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서 보냈다. 나는 막연하게 누리가 사회성이 부족한 것이 누리가 가지고 있는 질병 때문이거나 약의 효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누리의 학교생활과 관련해서 주치의와 상담을 했다. 주치의는 누리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게 누리가 가진 병 보다는 성격과 관련이 더 많은 것 같다고 했다. 누리가 약을 먹던 초기에 조용한 누리와 시끄러운 누리 둘 중에 어떤 쪽이 ‘진짜’ 누리인지 이전 병원의 선생님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는 전혀 고민하지 않고 조용한 누리라고 대답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반대였다. 어렸을 적부터 밝고 활달한 누리의 모습만을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조용한’ 누리가 원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풍을 가서 나무 아래서 혼자 김밥을 먹던 장면이 떠올랐다. 당시에 내 짝꿍은 그런 내가 너무 이상해 보였던지 다음 날 학교에서 소풍가서 왜 혼자 김밥을 먹고 있냐며 다음에는 자기랑 같이 먹자고 했다. 신기하게도 그때의 내 모습은 ‘조용한’ 누리와 많이 겹쳐진다.
신기하게도 한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 때마다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은 누리였다. 누리가 우리에게 위로의 말을 해준 것도 아니었고, 누리의 상태가 낙관적이거나 희망적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단지 누리가 집에서 밥을 먹고 게임을 하고 DVD와 유투브 동영상을 보면서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큰 위안이 됐다. 아내에게 얘기 하니 자신도 그렇다고 했다. 누리가 없다면 너무 쓸쓸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누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이렇게 큰 위로가 되다니, 왜 그럴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 가족이 미국에서 보냈던, 평범했던 수많은 ‘그날’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미국에서 겪었던 많은 것들을 지키려고 또는 기억하려고 노력했지만 많은 것들이 사라지거나 잊혔다. 내가 한국에서 우주가 야구하는 모습을 보는 게 행복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야구를 보는 동안 미국에서 행복하게 지냈던 시절을 떠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가족이 그곳에서 보냈던 수많은 평범한 ‘그날’ 속에는 옷세고 파크에서 야구를 하는 우주의 모습 뿐 아니라 집에서 스폰지밥을 보고 레고를 만드는 누리의 모습도 담겨 있다. 비록 이제는 DVD가 아닌 유투브 동영상을 보고, 레고를 만드는 대신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가장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건 누리가 하루를 보내는 방식일 것이다. 아마도 우리 부부는 하루를 보내는 누리를 지켜보면서 ‘그날’을 떠올리는 것 같다. 평범하지만 행복했던 ‘그날’은 아직도 누리의 하루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그날’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