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아웃
한국에 갈 때까지 세 경기 남았다. 피카렐라가 나머지 경기에서 모두 우주가 투수로 나올 수 있는 지 물었다. 우주의 대답은, “당근, 오케이지” 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여태껏 등판했던 순서를 감안하면 우주와 앤드류가 9월 28일 아이슬립 워리어스(Islip Warriors) 전과 10월 5일 베이쇼 머로더스전에 등판하는 것이 적당했다. 투구 수 규정 때문에 어떤 경기에서건 공을 많이 던지게 되면 다음 등판이 꼬이기 때문이었다. 두 경기 사이에 낀 10월 1일 하프할로우힐 썬더스(Half Hollow Hill Thunders) 경기는 등판하지 않는 게 나았다. 하지만 피카렐라 감독은 그 경기 역시 우주가 등판하기를 원했다. 첫 번째 이유는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우주가 좀 더 많은 경기에서 던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10월 1일과 10월 5일 모두 등판하는 것이 그리 무리한 일정은 아니었다는 것도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9월 28일, 아이슬립 워리어스와 경기를 했다. 우주는 6번 타자로 출전했다. 우리 팀 선발은 로건. 이 곳에서 봄, 여름, 가을 동안 야구를 하면서 아이들 야구 실력의 변화를 보게 된다. 내가 느낀 건 대부분 실력이 많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구는 오히려 퇴보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퇴보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5피트 늘어난 투구 거리였다. 150센티미터가 늘어나면서 스피드와 제구가 모두 잘 되지 않았다. 스피드를 내려고 몸에 힘이 들어가다 보면 제구가 안 되고 제구를 하려고 스피드를 줄이다 보면 공의 위력이 없어서 자꾸 맞아 나갔다. 두 번째 이유는 가을이 되면 대개 아이들이 두 가지 운동을 같이 하기 때문이었다. 봄과 여름에는 야구만 하지만 가을에는 미식축구나 아이스하키를 같이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아무래도 야구에만 신경을 쓰던 봄과 여름보다는 집중력도 떨어지고 연습량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1회 초, 로건은 처음 두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냈다. 봄과 여름에 보여주었던 구위와는 거리가 있었고 제구가 잘 되지 않았다. 제구가 안 되면서 투구 시간이 길어지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수비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면 으레 따라오는 것이 집중력이 떨어진 야수들의 실책. 우리 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볼넷 두 개와 안타 하나로 만든 무사 만루에서 3루수가 평범한 땅볼을 놓쳤다. 이후 주자 1, 3루에서 상대편의 주자가 2루 도루를 했다. 주자 2, 3루. 다음 두 타자를 삼진과 내야 땅볼로 잡았지만 다음 타자에게 우중간으로 빠지는 2루타를 맞았다. 다시 실점. 로건은 투구 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더 스피드가 떨어지고 제구도 흔들렸다. 다행히도 우리가 준 점수는 거기까지. 0:4. 하지만 우리 팀 타자들은 1회에 점수를 내지 못했다.
2회 초 피카렐라가 우주로 투수를 바꿨다. 우주는 2회를 잘 막았다. 2회 말 좌익수 옆으로 빠지는 우주의 2루타와 진루타, 희생플라이를 묶어서 한 점을 따라 갔다. 1:4. 3회에 올라 온 우주는 2루타를 맞았지만 두 명의 후속 타자들을 범타 처리했다. 하지만 2사 3루에서 볼이 뒤로 빠지면서 한 점을 더 내줬다. 1:5. 직구가 아주 잘 제구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간간이 자신이 터득한 변화구(슬라이더와 비슷했다)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잘 빼앗았다.
3, 4회 우리 팀 타자들이 무섭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두 이닝 동안 대거 9득점. 10:5. 5회까지 우주는 안정적으로 투구하며 더 이상 실점하지 않았다. 5회 말 우리 팀은 무사 만루라는 절호의 찬스에서 주루 플레이 미스로 추가점을 내지 못했다.
6회 초 벤으로 투수가 바뀌었다. 올라오자마자 연속으로 볼넷을 내주었다. 무사 1, 2루에서 다음 타자를 외야 플라이로 잡았지만 그 다음 타자에게는 2루타를 맞으면서 한 점을 내주었다. 10:6. 그 다음 타자도 볼넷. 벤은 여전히 영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1사 주자 만루. 피카렐라가 조금 걱정스런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라갔다. 하지만 벤의 투구는 여전히 불안했다. 다시 볼넷. 10:7. 5회 말 만루에서 점수를 내지 못한 게 계속 아쉬웠다. 볼, 볼, 파울, 파울. 투 스트라이크 투 볼.
그런데, 갑자기 유격수를 보던 우주가 질문이 있는 학생처럼 손을 들었다. 나는 처음에는 경기에 집중하고 있느라 우주가 손을 든 것을 보지 못했다.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키고 우주 쪽으로 갈 때 즈음에야 우주가 타임아웃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주가? 왜?
심판이 천천히 우주에게 다가갔다. 우주가 심판에게 뭔가를 얘기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상황에서 가장 가능성이 많은 건 생리현상이었다. 하지만 왠지 우주의 표정은 그런 이유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해 보였다. 피카렐라를 포함한 우리 팀 부모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쪽을 흘끔 거렸다. 우주의 말을 듣고 난 심판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뭘까.
심판이 상대편 덕아웃으로 가서 워리어스 감독에게 뭔가를 얘기했고 그는 전혀 문제없다는 듯이 짧게 어깨를 으쓱했다. 심판이 홈플레이트로 돌아가서 타석에 서 있는 타자로부터 배트를 받은 다음 1루심을 불러 잠깐 상의를 했다. 그리곤 피카렐라에게 와서 뭔가를 얘기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피카렐라는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흐뭇하게 웃었다. 관중석에 있는 우리 팀 부모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아하, 난 알 것 같았다.
우주와 나는 경기 하루 전날 선컴 파크가 아닌 옷세고 파크에서 연습을 했다. 그 날은 당시 1, 2위 팀이었던 롱아일랜드 콘텐더스(Long Island contenders)와 베이쇼오 머로더스의 경기가 있었다. 이 경기에서 콘텐더스의 감독이 상대편 선수의 배트가 규정과 맞지 않는 컴포짓 배트라고 항의했다. 심판은 상대편 선수의 배트를 확인한 후에 콘텐더스 감독의 항의를 받아들였다. 규정이 아닌 배트를 사용한 것에 대한 특별한 벌칙은 없었다. 그냥 이후에 그 배트를 안 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우주가 상대 선수의 배트가 부정배트라고 생각한 근거가 뭘까.
경기가 다시 속개되었다. 놀랍게도 우주의 타임아웃이 상대 팀의 상승세에 완전히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벤은 이후의 타자들을 삼진과 내야 땅볼로 잡았다. 10:7. 우주는 3이닝 동안 1실점했고 2타수 1안타 볼넷 하나 2루타 하나였다. 가을 리그에서 보여준 가장 좋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오늘 우주가 한 결정적인 역할은 투구도 타격도 아니었다.
피카렐라가 야구를 하면서 우주가 영어로 뭔가를 얘기하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라면서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했냐며 신통해 했다. 경기가 끝나고 난 후 그는 우주에게 앞으로 다시 그런 순간이 오면 주저 없이 타임아웃을 요청해도 된다고 얘기했다. 존의 아빠도 우주가 너무 절묘한 시점에 타임아웃을 요청했다고 칭찬했다.
실제 프로야구 경기에서도 상대편 투수가 너무 잘 던지고 있으면 투구 폼에 정지 동작이 없다거나, 투수의 목걸이가 타자의 시야를 방해한다거나, 투수가 로진 백을 손에 너무 많이 묻힌다는 것들과 같은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아서 분위기 전환을 노리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우주의 타임아웃이 바로 그런 효과를 낸 셈이었다. 물론 우주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타임아웃을 요청한 건 아니었지만. 나중에 물어보니 우주는 벤이 자신의 배트가 규정에 맞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를 그날 연습 중에 들었고 벤이 사용했던 배트의 타구음과 상대 팀 선수 배트의 타구음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심판에게 배트 확인을 요청한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이 경기에서 최고의 순간은, 바로 우주의 ‘타임아웃’이었다.
다음 경기의 상대는 하프할로우힐 썬더스. 또 다시 말린즈이다. 썬더스가 말린즈 선수들이 주축이 된 팀이기 때문이다. 내셔널즈는 6월 15일 옷세고 파크에서 말린즈를 극적으로 누르고 봄 리그에서 우승했다. 열 점차를 뒤집은, 말 그대로 ‘극적인’ 역전 우승이었다. 하지만 같은 전력으로 다시 붙는다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낮았다. 우주는 말린즈와 맞붙은 네 번의 경기 중 세 번을 던졌지만 별로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나마 결승전에서 마무리로 2이닝을 던졌을 때의 성적이 가장 나았다. 우주는 봄 리그에서 던질 때보다 구위와 스피드가 모두 좋아졌다. 만약 여름리그에서 썬더스를 만났다면 좋은 승부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여름리그에서 썬더스는 골드 브라킷이었고 우리 팀은 브론즈 브라킷이었기 때문에 만날 일이 없었다.
상대 전적 2승 2패, 결승전에서 말린즈를 누르고 우승했지만, 그럼에도 왠지 말린즈(썬더스)와 한 번 더 진검승부를 하고 싶었다. 물론 내가 원한 결과는 승리였다. 극적인 역전승이 아닌 코를 납작하게 해줄 정도의 완벽하고 압도적인 승리. 우리 팀이 한 수 위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경기 전날 피카렐라가 이메일을 보내 우주가 ‘빅게임’을 잘 준비하고 있는지 물었다. 자신과 코치 존을 위해서 마운드에서 최선을 다해 던져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여태까지 봄과 가을 동안 피카렐라 와 같은 팀에서 야구를 했지만 시합 전날 승리를 꼭 지켜달라는 이메일을 보낸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 경기는 결승전도 플레이오프 경기도 아닌 그냥 리그전 중에 한 경기일 뿐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이유일 수도 있다. 우주는 이제 두 경기만을 남겨 두었고 2주 후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게다가 상대 팀은 우주가 늘 고전했던 팀이었으니 피카렐라가 우주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보낸 이메일일 수도 있다. 아니면, 평범한 경기로 생각하고 던지는 것보다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경기에 임하는 것이 우주에게 기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을 수도 있다.
우리 팀은 4승 1패, 현재 7승으로 1위를 달리고 있는 컨텐더스에 이어서 11개 팀 중에서 2위였다. 썬더스는 2승 2패로 6위. 우주는 선발 투수 6번 타자로 출전했다. 피카렐라 씨는 경기에 앞서서 아이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두 경기에 우주와 앤드류가 마운드에 올라갈 것이고 우리 팀의 원투 펀치가 던지는 경기이기 때문에 반드시 두 경기 모두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두 경기를 끝으로 우주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도. 아이들이 많이 아쉬워했다.
공교롭게도 상대 투수는 봄 리그 결승전에서 만났던 바로 그 투수였다. 우리 팀은 1회 초 공격에서 볼넷을 두 개 얻었다. 확실히 투구 거리가 5피트 늘어난 것은 투수들에게 여러모로 불리하게 작용한다. 투수들의 구위와 스피드가 매번 경기마다 다르긴 하지만, 봄 리그 결승전에서 우리 팀 타자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던 강력한 스피드는 사라졌고 날카로웠던 제구력도 들쭉 날쭉이었다. 테이블 세터들에게 던진 공들이 제구가 잘 되지 않으면서 볼넷을 내줬고, 중심타자들과 상대할 때는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 그러면서 또 연속 볼넷. 1사 만루에서 존이 타석에 들어섰다. 존은 결승전 때도 그랬지만 역시 상대 투수에게 아주 강했다. 존은 초구를 쳐서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깨끗한 안타를 만들어냈다. 2:0. 우주가 타석에 들어섰다. 볼. 볼. 여전히 제구가 되지 않았다. 세 번째 공을 받아쳤다.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 3:0. 이후 두 타자는 내야 땅볼과 삼진으로 아웃됐다.
1회 말 우주가 마운드에 올랐다. 우주는 선두 타자를 잘 잡았지만 이후 연속 볼넷을 내주었다. 4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전에도 이 팀의 4번 타자는 우주에게 아주 강했다. 스트라이크. 볼. 파울. 네 번째 던진 공을 밀어쳤고 공은 우익선상으로 완전히 빠져나갔다. 심판은 페어를 선언했다. 주자 일소 3루타. 피카렐라는 파울이라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관중석에서 볼 때도 파울 같았지만 심판 판정을 따를 수밖에. 3:2. 이후 희생플라이로 한 점을 더 내주었다. 3:3.
2회 초 우리 팀은 기회가 있었지만 추가점을 내는데 실패했다. 2회 말 우주는 볼넷을 내줬지만 이후 타자들을 삼진과 범타로 잘 마무리했다. 3회에도 상대 투수는 여전히 영점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썬더스는 투수를 교체했다. 바뀐 투수도 봄 리그 결승에 나왔던 투수였다. 하지만 제구가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우주의 2타점 적시타를 포함해서 우리 팀은 6점을 더 냈다. 6점 중에는 우주의 홈스틸로 얻은 점수도 있었다. 9:3.
3회부터는 앤드류가 던졌다. 앤드류의 구위는 여전히 뛰어났다. 볼넷을 줬지만 한 점만을 내줬다. 9:4. 4회 초 우리 팀은 여전히 제구가 불안한 상대 투수로부터 볼넷을 얻어내 밀어내기로 두 점을 추가했다. 11:4. 4회 말에 올라 온 앤드류가 갑자기 제구를 잡는데 애를 먹었다. 안타 하나와 연속 볼넷으로 무사 만루. 위기였다. 리틀 야구에서 7점이라는 점수는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점수였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우리 팀의 투수가 앤드류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상대해야 할 타자들이 상대 팀의 하위 타순이라는 점이었다. 역시 앤드류는 에이스다웠다. 이후의 타자들을 땅볼과 두 개의 삼진으로 마무리했다. 11:4.
이겼다. 비록 극적인 역전승이 아니라 짜릿하진 않았지만, 또 결승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긴다고 해서 우승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또 썬더스가 예상했던 것만큼 그리 강팀이 아니어서 조금 싱거운 승부였지만, 우린 하프할로우힐 리그의 라이벌 팀을 상대로 기분 좋은 완승을 거뒀다. 피카렐라와 코치 존과 내가 고대했던 것처럼. 우주는 1회에 석 점을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했지만 더 이상의 실점을 하지 않으면서 잘 막았고, 타석에서는 두 타석 모두 안타를 치며 3타점을 올렸다. 홈스틸은 팬 서비스. 닉의 가족들이 경기를 보러 왔다. 스테파니는 여전히 우렁찬 목소리로 우주를 응원했다. 경기가 끝나자 피카렐라와 코치 존은 약속이나 한 듯이 덕아웃에서 뛰쳐나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너무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표정 관리를 했다.
경기가 끝난 후 피카렐라가 아이들을 경기장에 모아 놓고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하프할로우힐의 최강팀이 누구라고?”
코치 존이 헐크 호건처럼 귀에 손을 갖다 댄 채 아이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우리, 마린스!”
그라운드에 앉은 모든 아이들이 승리의 기쁨이 아직 채가시지 않은, 들뜬 목소리로 피카렐라를 향해서 소리 질렀다. 이제 한 경기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