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드 게임
1996년 9월. 공연을 올리기 닷새 전이었다. 우리는 의과대학 축제 기간 행사 중의 하나인 분극의 밤 연습을 위해서 강당에 모였다. 다른 학년이야 완성도에 신경 쓰지 않고 대충 올려도 상관이 없었지만 4학년은 그럴 수 없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한 끝에 최종적으로 결정된 작품은 이강백의 <결혼>. 내가 연출을 맡았고, 4학년 대표였던 동준이 기획을 맡았다. 문제는 배우였다. 석 달 후에 국가고시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배우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참고로 두 해 전 의사국가고시는 역대 최저 합격률을 기록했다). 결국 남자와 하인 역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연극반이었던 한수와 정태가 맡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여배우가 없었다. 연극반 여자 동기들과 연극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여학생들에게 제안을 했지만 개인 사정이나 실습 일정이 맞지 않아서 모두 거절당했다. 결국 거의 모든 여학생들에게 거절당했을 시점에 같은 실습 조였던 여학생이 자기가 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당연히 오케이였다. 그리하여 간신히 공연 열흘 전에 연극 <결혼>의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의사국가고시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연습을 하는 동안만큼은 막 연극을 시작했던 신입생 때처럼 즐거웠다. 적어도 난 그랬다. 몸을 풀고 발성 연습을 하고 장면을 만들다 보면 시간이 어느새 훌쩍 지나갔다.
“얘는 왜 안 와?”
동준이 시계를 보며 투덜거렸다.
“올 때까지 네가 대신 좀 해라.”
아싸, 동준이 신나서 대본을 들고 냉큼 무대로 올라갔다.
정태는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동문회와 담임반 모임이 모두 잡혀 있었다. 동준은 연습을 두 번 빠져야 한다고 얘기하는 정태에게 꼴랑 열흘 연습하는데 말도 안 된다며 벌금을 걷겠다고 협박 했다. 원칙적으로는 당연히 같이 연습을 해야 하는 게 맞지만 정태가 두 번 정도 연습을 빼먹는다고 공연이 어떻게 되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20분이 조금 넘는 단막극인 <결혼> 속에서 정태가 맡은 역할은 대사 한 마디 없이 남자 주인공의 물건을 하나씩 빼앗는 하인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번밖에 안 빠지는 것에 내가 감사해야 당연했지만 동준에게는 안 통했다.
“오늘 메뉴는 뭐냐?” 한수가 물었다.
“볶음밥과 깐풍기 되겠슴다.”
셋이 동시에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동준은 항상 두둑한 제작비가 있으니 마음껏 먹으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연습 때마다 근처 중국집에서 요리(보통은 탕수육, 가끔은 깐풍기)를 시켜주며 돈 많은 기획자 행세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써도 줄지 않는 화수분이라고 큰소리를 쳤던 제작비는 공연 사흘 전 동이 났다. 대부분 식비였을 것이다.
연습을 시작한 지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때 중국집에 시킨 저녁이 도착했다.
“연출 선생님, 하인이 계속 물건을 뺏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동준이 밥을 다 먹고 나서 손을 번쩍 들더니 수업시간에 질문을 하는 학생처럼 짐짓 예의바르게 물었다.
“인생이라는 게 뭔가를 계속 잃어버리거나 뺏기는 거잖아.” 내가 말했다.
“시인으로 태어나 도둑처럼 살다가 흡혈귀로 죽는 거지.”
한수가 담배 연기를 후욱 공중으로 내뿜었다.
“에잇, 비관적인 쉐끼들.”
“하지만 결국 사랑을 덤으로 얻잖아.” 여학생이 말했다.
“오호라, 그래서 여자 이름이 ‘덤’이구만.” 동준이 벽시계를 쳐다봤다. “근데 정태 이 쉐끼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정작 이런 주옥같은 얘길 새겨들어야 할 놈은 술이나 퍼마시고 있으니.”
끼익, 강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쏴리.”
정태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우리 넷은 모두 정태를 보고 반색을 했다.
“어이 홍익인간, 빨랑 와서 벌금이나 내셔.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이나 사먹어야 쓰것다.”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술 취한 하인은 자꾸 동선이 꼬였다. 다행히도 대사가 꼬이지는 않았다. 대사가 없었으니까. 동준은 연습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며 따로 보충 연습을 시켜야겠다고 정태를 협박했다. 모일 시간도 없는데 무슨 수로 따로 연습 시키겠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닷새 후에 우리는 큰 실수 없이, 비록 작은 실수들은 좀 있었지만, 무사히 <결혼>을 마쳤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동준은 3관왕(작품상, 남우, 여우주연상)은 따 논 당상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심사위원들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나마 한수가 남우주연상을 받아서 체면치레는 한 셈이 됐다. 연극이 끝나고 우리 다섯은 무대 위에서 다 같이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 플래쉬처럼 눈부신 날이었다. 사진 속에는 우리의 그날이 환하게 붙잡혀 있었다.
2005년 봄, 대전 자운대를 떠나는 가족들의 등 뒤엔 이 일대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병산이 우두커니 서 있었고 백목련과 자목련 나무들이 찻길을 따라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자운대는 우주와 누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었고 우리 부부가 결혼한 후에 3년 동안을 같이 지낸 실질적인 첫 보금자리였다. 우주는 자운대에서 태어나서 기다가 걷다가 뛰어다녔다. 그리고 가끔씩 넘어졌다. 2년 뒤에 누리가 태어났다. 누리가 태어난 것은 우리 가족들 모두에게 기쁨이었지만 조리원에서 누리를 안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처음 본, 두 돌이 채 안 된 우주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통곡했다.
우리 가족은 그 모든 시간을 뒤로 하고 2005년 3월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아파트의 화단에는 둥글둥글한 목련 나무 대신 메타세콰이어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솟아나 있었다. 서울의 아파트는 자운대의 아파트보다 훨씬 높았고 하늘은 훨씬 더 좁은 것처럼 느껴졌다. 서울에 올라와서 어린이집을 다니던 초기에 우주는 감기를 달고 살았다. 우주가 아프면서 덩달아 누리도 아팠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두 아들과 하루 종일 두 명의 환자를 보느라 지친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의 두 달 동안 우리 집은 소아과 병실이었고, 주먹만한 목련꽃이 환하게 피어 있던 봄날 내내 나와 아내는 특별한 이유 없이 우울했다.
그 당시에 나와 아내는 우주와 누리가 잠든 저녁에 TV를 보다가 종종 자신들도 모르게 자운대의 일기예보를 유심히 듣곤 했다. 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은 자운대가 아닌 서울이었고,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조금 허탈해 했다. 두 달이 지난 후에 우주와 누리의 감기는 많이 좋아졌다. 여전히 둘 모두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지만 표정만은 밝았다. 아내는 두 달 동안의 고생이 끝난 걸 기념하는 의미에서 우주와 누리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채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사진에 담았다. 비록 아팠지만 행복했던, 그리고 어딘가를 시름시름 그리워했던 그날이 사진 속에 붙잡혀 있었다.
학년이 올라가고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었지만 우주와 나의 하루 일과는 여전히 비슷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 비슷했지만 조금 달라졌다. 우리는 여전히 주중 오후에 선컴 파크에서 규칙적으로 야구 연습을 했다. 9월 24일 역시 그랬다. 초가을의 햇빛은 여름보다 조금 부드러웠고, 봄과 여름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소프트볼을 하는 소녀들은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 농구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옷세고 파크 곳곳에서는 남자 아이들이 야구공 대신 타원형의 풋볼 공을 던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우주도 이곳에서 몇 년 더 살았다면 풋볼을 했을 것이다. 존의 엄마 크리스틴은 우주가 공을 잘 던지니까 쿼터백을 하면 잘할 것 같다고 얘기하곤 했다.
선컴 파크에는 길고 널찍한 나무판을 들고 크리켓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보였고, 주말 아침에는 풋볼(아메리칸 풋볼)을 즐기는 덩치 큰 아저씨들이 외야의 넓은 잔디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녔다. 우주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면 선컴 파크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는 얘길 하곤 했다. 언젠가 우주가 한국으로 꼭 돌아가야 하냐고 물었다. 다른 사람은 남을 수도 있지만 아빠는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고 대답했더니 그건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며칠 후 연습을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주가 물었다.
“기도를 하면 정말 하나님이 들어 주시는 거야?”
“언젠가는.” 내가 말끝을 흐렸다.
당시에 우주는 같은 질문을 목사님께도 했던 것 같다. 목사님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우주의 식사 전 기도는 한국에 갈 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길어졌다. 어떤 기도였을까, 물어보진 않았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한국에 전화를 하면,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아버지의 전화 목소리는 점점 밝아지고 있었고 말수가 늘었다. 우주의 기도가 길어지고 아버지의 말수가 늘어나면서 우리는 조금씩 한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미스타운 불스(Smithtown Bulls)와 경기를 했다. 우주는 우익수 9번 타자로 출전했다. 우리 팀 타자들은 1회 상대팀 야수들의 실책과 볼넷, 그리고 적시타로 대거 13점을 득점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곤 했던 여름 리그 경기를 생각나게 하는 경기였다. 하지만 선발 벤은 2회와 3회에 계속 볼넷을 내주면서 2점을 주었다. 13:2. 4회 우리 팀은 한 점을 더 냈다. 14:2. 4회에 10점 차 이상이면 콜드 게임이었다. 하지만 3회부터 던지기 시작한 존도 볼넷이 많았다. 투수들의 볼넷은 전염성이 있다. 애들 야구에서는 더더욱. 4회 말 상대 팀은 두 점을 더 따라 붙었다. 14:4. 한 점을 더 내준다면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 새로운 투수를 투입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다행히도 존은 만루의 위기에서 후속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다. 우주는 2타수 1안타 1타점. 타격감이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경기를 마치고 오는 길에 월트 휘트만 몰(mall)에 들러 저녁으로 먹을 라지 사이즈의 피자와 갈릭 번, 6개들이 하이네켄 한 팩을 샀다. 근처에 있는 드라이브 쓰루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을 찾아서 집으로 오는데 도로 오른 편에 있는 티모바일 매장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에서 휴대폰을, 정확하게는 유심카드를, 바꾼 후부터 한글로 문자를 보낼 수 없었다. 미국에 온 초기부터 알고 있던 문제였지만 그 때는 문자를 보낼 일이 별로 없었고 그것 외에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시기는 아마도 주변 사람들과 가끔씩 문자를 주고받을 일이 생겼던 봄, 그러니까 3월이나 4월 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당시에 생각해낸 원인은 통신사였다. 왜냐하면 기계는 한국에서 쓰던 거 그대로였고 미국에서 바뀐 건 통신사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티모바일 매장의 직원도 우리의 추론을 쿨하게 인정했다. 아마도 통신사와 휴대폰 기계간의 어떤 ‘충돌’ 때문일 것이라는 자신의 생각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가 문제를 인정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어차피 휴대폰을 바꾸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매장을 나오면서 바로 옆 건물과의 경계에 세워진, 검은 글씨로 ‘휘트먼 생가’라고 적혀 있는 나무판을 보았다. 매장 앞을 지나는 도로명이 월트 휘트먼 로드이고 길 건너편에 있는 상가가 월트 휘트먼 몰이니까 이 지역 어딘가에 월트 휘트먼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방금 전에 들렀던 티모바일 매장 바로 옆 건물이라는 사실은 조금 놀라웠다. 한 가지 더 놀라웠던 건 내가 월트 휘트먼이라는 시인과 그의 시에 대해서 전혀 모름에도 그가 왠지 친근한 시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건 웰튼 고등학교의 학생들에게 자신을 대담하게 “캡틴, 오 마이 캡틴.”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했던 키팅 선생님 때문이었다. 그때 생각났다, 카르페 디엠. 씨즈 더 데이(Seize the day). 그날을 붙잡으라.
그날 저녁 함께 식탁에 앉아서 피자와 갈릭 번을 먹었다. 그날은 미국에서 보낸 수많은 평범한 날들 중의 하루였다. 낮에는 우주와 선컴 파크에서 연습을 했고, 오후에는 옷세고 파크에서 경기를 관람하면서 응원을 했고, 저녁에는 집에서 기억을 더듬으며 카카오스토리에 오늘 경기를 요약해서 포스팅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빈 맥주 캔을 물끄러미 보면서 더 이상 시간이 흐르지 않고 이 순간에 멈춰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을 붙잡으라. 하지만 그날은 결국 사라지고 어김없이 내일이 온다. 세상에는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꿈을 꾸었다.
아침 일찍 우리 가족은 시에나를 타고 동쪽으로 가고 있었다. 도로에 떨어지는 햇빛은 희미하지만 투명하게 빛났고, 길가에 서 있던 나무들은 물결처럼 느리고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멀리서 길쭉한 원기둥 형태의 등대가 보였다. 바다를 향해서 웅크린 짐승의 등 위로 솟아오른 길쭉한 뿔처럼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보행로로 올라가다 보니 녹색 바탕 위에 금빛으로 ‘몬톡 등대’라고 쓰인 간판이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몬톡, 롱아일랜드의 동쪽 끝. 1796년에 뉴욕 주에서 지은 최초의 등대라는 설명도 적혀 있었다.
갈색 벽돌로 지은 이층 건물 바로 뒤에 높이 솟은 등대가 있었고 등대 정면으로는 아득한 푸른 바다와 수평선이 보였다. 햇빛이 잘게 쪼개져 수평선 근처를 수놓고 있었다. 생각보다 바람이 강했다. 둔덕의 앞쪽에 아이보리 색 카디건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금발의 머리를 바람에 휘날리며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명상을 하는 건가.
“저 사람도 소원을 비는 거야?” 우주가 말했다.
“소원 빌려구?” 내가 말했다.
“무슨 소원 빌 건데?” 아내가 날아가려는 모자를 손으로 붙잡으면서 물었다.
“몰라.”
“이왕 왔으니까 모두 소원을 빌어볼까? 누리도 눈 감고 마음 속으로 소원 빌어.”
아내가 누리의 손을 잡아서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우리 모두는 바다를 향해서 눈을 감았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닿았고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눈꺼풀을 간질였다. 아내가 내 손을 꼭 쥐었다. 나는 왼쪽에 서 있던 우주의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신기하게도 우주가 손을 빼지 않았다. 다시 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리고 눈 속이 빛으로 환해졌다.
그날이 그렇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