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송구

by 생각의 변화

악송구


9월 19일 코맥 나이츠(Commack Knights)와 두 번째 경기를 했다. 원래는 9월 16일 예정됐던 경기였는데 옷세고 초등학교가 경기장을 사용해야 해서 사흘 뒤로 연기된 것이었다. 우주는 6번 타자 우익수로 출전했다. 상대팀은 현재 3패를 기록 중이었지만 가을리그에 참여하는 어떤 팀도 방심할 순 없다. 상대 팀 선발 투수는 체격이 꽤 큰 편이었는데, 우리 팀에서 가장 덩치가 큰 프리다보다도 더 컸다. 공의 스피드는 괜찮았지만 제구가 좋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공이 높았다.

1회 초 우리 팀 테이블 세터들은 참을성있게 공을 잘 골라냈고, 원하는 공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효과적으로 공략했다. 존은 무사 2, 3루에서 좌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타구를 날렸다. 존이 친 타구는 외야 뒤쪽에 있는 아스팔트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굴러갔다. 그라운드 홈런. 존의 아빠가 환호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옷세고 초등학교 운동장이 펜스가 없기 때문에 펜스가 있어야 하는 위치인 아스팔트 구역 앞쪽에 떨어져서 굴러간 공은 그라운드 홈런이 아닌 인정 2루타라고 했다. 심판이 정정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 아웃, 주자 2루.

우주가 타석에 들어섰다. 우주는 이전에 쓰던 이스턴 배트를 들고 나왔다. 결과는 삼진. 문제는 배트가 아니라 선구안이었다. 타자 중에는 트윈스의 이병규처럼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공을 만들어서 치는 배드볼 히터(bad ball hitter)가 드물게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글스의 김태균이나 신시낸티 레즈의 조이 보토처럼 뛰어난 선구안으로 좋은 공을 잘 골라서 치는 타자들도 존재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평균적인 선수들의 경우에 후자를 모델로 하는 것이, 그러니까 좋은 공을 골라서 치는 것이 좋은 타구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 테드 윌리엄스가 <타격의 과학>에 썼듯이 좋은 공을 골라서 치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다.

초구와 두 번째 공 모두 어깨 높이 정도로 오는 아주 높은 공이었는데 우주는 두 번 모두 헛스윙을 했다. 이후에 두 개를 커트 했지만 결국 다섯 번째 공에 헛스윙하면서 삼진 아웃 됐다. 다음 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이없이 높은 공에 배트가 너무 쉽게 나갔다. 우주답지 않았다. 평소에는 무리하지 않고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을 정확하게 맞추는 타격을 하는 편이었는데 이날은 공을 따라다니며 덤비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첫 경기 때 자신의 타순이 12번이었기 때문에 감독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다.

우주가 삼진을 당했음에도 우리 팀은 다섯 점을 뽑았다. 우리 팀 선발 투수인 벤은 3이닝 동안 한 점도 주지 않으며 호투했다. 5:0. 우리 팀 타자들은 4회 초까지 여섯 점을 더 냈다. 11:0. 4회에는 투수가 마르코로 바뀌었다. 마르코는 키가 작았지만 팔의 타점이 높고 공의 스피드가 좋았다. 로건이 던지는 방식과 비슷했다. 한 점을 주긴 했지만 거기까지. 11:1.

이기긴 했지만 우주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단지 삼진을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봄, 여름 리그를 거쳐서 가을리그까지 우주가 뛴 경기에서 우주는 어떤 식으로든 경기 결과에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의 경기에서는 승리에 도움을 주었지만 말린즈 전처럼 7점차의 점수 차를 지키지 못하고 패하게 만든 경기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에 우주가 잘해야 팀이 이겼고 우주가 못하면 패했다. 우주가 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맥화이트나이츠와의 경기에서 우주는 팀의 승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우주가 우울한 이유는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팀 내에서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두 번째 경기가 끝나고 우주에게 새로운 배트를 사주었다. 루이스빌 슬러거(Louisville slugger)에서 나온 워리어 티피엑스(Warrior TPX). 드마리니 배트를 구입할 때보다도 종류가 더 줄어서 금방 고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리그 규정이 신경 쓰여서 고르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걸렸다. 나중에 보니 디아즈의 배트와 무게만 다른 제품이었다. 새로 산 워리어 티피엑스는 이전 배트보다 길이가 1인치 짧았지만, 무게는 같았다. 우주는 리그 사무실에서 공인 스티커를 받을 때까지 포장을 뜯지 않았다. 혹시 공인 배트가 아니라면 반품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레이저 킹덤에서 생일파티

이틀 후 세 번째 경기가 있던 날 서비스 로드를 타고 옷세고 파크로 향했다. 이 지역에서 산 지 오래된 교인들은 길이 자주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을 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 온 지 꽤 지난 시점에도 어떤 곳을 가든 가민을 켜고 다녔다. 심지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던 프로스펙트 스포츠나 오백 미터 남짓한 거리에 있던 코스트코, 타겟을 갈 때도. 가민이 제시하는 경로는 항상 똑같았다. 아발론 아파트에서 남북 방향으로 이동할 때는(주로 선컴 파크나 교회에 갈 때) 110번 도로를, 동서로 이동할 때는(주로 옷세고 파크를 갈 때) 롱아일랜드 고속도로를 알려줬다.

정확하진 않지만 우리가 서비스 로드로 다니기 시작했던 건 여름 방학 때부터였을 것이다. 방학 동안 누리는 체스트넛 초등학교에서 하는 두 시간짜리 썸머 클래스를 들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었다. 체스트넛 초등학교는 집에서 동쪽으로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고 차로 가면 십 분이 채 안 걸렸다. 평소 같았으면 롱아일랜드 고속도로를 알려줬겠지만 가민이 가르쳐 준 길은 롱아일랜드 고속도로 옆으로 평행하게 나 있는 사우스 서비스 로드(South service road)였다. 체스트넛 초등학교가 사우스 서비스 로드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을 정도로 도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알게 된 새로운 즐거움이야.”

옷세고 파크에 거의 도착해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아내가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뭐가?”

“서비스로드로 다니면서 창밖을 감상하는 거.”

신호가 바뀌었다. 아내 쪽을 쳐다보았다. 창밖으로 주택가의 평범한 풍경이 천천히 지나갔다. 집과 집 사이로 난 좁은 길이 보였고 훌쩍 자란 높은 나무들의 숲이 부드럽고 조용하게 출렁거리고 있었다.

“뭐가 다른 지 느껴져?” 아내가 물었다.

“글쎄, 분명하지는 않지만 알 것 같기도 해.”

결승선을 향해서 달려가는 경주가 아니라 아무런 목적 없이 느리게 산책하는 기분, 이걸 말하는 건가.

“바로 옆길인데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인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우주는 8번 타자 중견수로 출전했다. 경기가 시작하기에 앞서 피카렐라는 상대 팀 롱아일랜드 인페르노스(Long Island Infernos) 감독과 인사를 나눴다. 평소에 친분이 있는 사이 같았다. 나는 우주가 배팅케이지에서 연습하는 동안 상대 팀 투수가 연습 투구 하는 것을 지켜봤다. 스피드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제구력이 좋아 보였다.

이 팀은 2013년 쿠퍼스타운 리그의 우승팀이었고 이 팀의 원투 펀치가 이끄는 선발진은 45이닝 동안 단 한 점도 실점하지 않았다고 한다. 45이닝이면 한 경기를 6이닝으로 쳐서 생각해도 일곱 또는 여덟 경기 동안 단 한 점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건 이 팀의 투수들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수비 역시 탄탄하다는 의미였다. 처음 들었을 땐 믿기 힘든 기록이었지만 시합을 하고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 팀 선발은 앤드류. 초반은 팽팽한 투수전이었다. 3회가 끝날 때까지 양 팀 모두 단 한 점도 뽑지 못했다. 앤드류는 여전히 주자들을 자주 견제하긴 했지만 이전 경기에 비해서는 횟수가 줄었고 첫 경기 때보다도 더 위력적인 공을 던졌다. 구위로 보면 상대팀 투수에 비해서 앤드류가 훨씬 더 뛰어났지만 상대 팀 투수도 공의 스피드에 변화를 주면서 우리 팀 타자들의 타이밍을 잘 빼앗았다. 우리 팀은 루상에 주자들을 몇 번 내보냈지만 후속타가 번번이 상대방의 호수비에 걸렸다. 3회에 디아즈가 2사 2, 3루에서 친 타구도 아주 잘 맞았지만 아쉽게도 중견수 정면이었다.

4회 말 우리 팀은 프리다와 존의 적시타로 두 점을 얻었다. 2:0. 5회 초 앤드류는 첫 번째 타자를 삼진으로 잘 잡았다. 하지만 그 다음 타자는 볼넷. 또 볼넷. 피카렐라가 내게 우주를 준비시켜 달라고 했다. 그 다음 타자가 친 타구는 2루수 정면으로 굴러갔고 비글루치는 2루 주자를 아웃시켰다. 투아웃, 1, 3루. 앤드류의 구위가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상대 팀 타자들은 초반과 달리 배트 중심에 잘 맞췄다. 연속해서 볼이 두 개 들어왔다. 세 번째 공에 상대 타자가 휘둘렀다. 우중간으로 날아가는 강한 타구였다. 2루타. 주자가 모두 들어오면서 2실점. 2:2. 교체 타이밍이었지만 피카렐라는 투수를 바꾸지 않았다. 앤드류는 다시 안타를 허용했고 주자 1, 3루 상황에서 도루를 허용했다. 투 아웃, 2, 3루.


인페르노스 전


결국 피카렐라가 타임아웃을 요청하고 마운드에 올라갔다. 투수 교체. 우주는 첫 번째 경기 때처럼 또다시 위기 상황에 올라왔다. 하지만 전보다 훨씬 더 여유 있는 표정이었다.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 쉽게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전보다 제구도 안정적이었다. 상대 팀 타자가 세 번째 공을 받아 쳤지만 빗맞아서 우주 앞으로 굴러왔다. 평범한 땅볼이었다. 공을 잡아서 1루로 던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루수 키를 훌쩍 넘어가는 악송구가 됐다. 주자가 모두 홈으로 들어왔다. 2실점. 2:4. 뼈아픈 실책이었다. 다음 타자는 삼진.

5회 우주는 타석에서 아주 좋은 타구를 날렸지만 아쉽게도 좌익수 정면이었다. 그날 우리 팀 타자들이 친 타구 중에서 가장 잘 맞은 타구였다. 운이 따르지 않았다. 6회 초에 우주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삼진, 삼진, 1루수 땅볼. 삼자 범퇴. 두 번의 실수는 없었다. 6회 말 첫 타자는 삼진. 다음 타자인 마이클 피카렐라는 볼넷으로 걸어 나갔다. 중심타선으로 이어지는 좋은 기회였다.

타석에는 로건. 볼, 볼. 파울. 다음 공을 받아쳤다. 좌익수 방향으로 꽤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좌익수 플라이 아웃. 외야 깊숙한 곳이었기 때문에 2루로 태그업을 할 수 있었지만 타구가 빠질 거라고 생각한 마이클이 너무 빨리 출발했다. 귀루했다가 다시 2루를 노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피카렐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불만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투 아웃. 주자 1루.

피카렐라의 불만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로건의 타석에서 마이클이 2루 도루를 시도하지 않은 것. 다른 하나는 좌익수 플라이때 2루로 태그업을 하지 못한 것. 2루 도루를 하고 3루로 태그업을 했다면 2사 3루였다. 2사 3루와 2사 1루는 엄청난 차이다. 두 점 차이에서 3루에 있는 주자는 투수에게 위협적이지만 1루에 있는 주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음 타석은 벤. 벤은 2루 땅볼로 아웃됐다. 경기 끝. 2:4.

아쉬움이 많이 남는 경기였다. 우주의 악송구도 아쉬웠지만 4회와 5회에 디아즈와 우주의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간 것도 두고두고 아쉬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경기 내용으로만 보면 여태껏 했던 경기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경기였다. 우주의 악송구를 제외하면 양 팀 모두 수비가 완벽했고 시종일관 긴장감이 팽팽했다. 아내도 오늘 본 경기가 미국에 와서 본 경기 중에서 가장 수준 높은 경기였다고 했다. 오늘 우주는 타석에서는 2타수 무안타였고 마운드에서는 자책점은 없었지만 결정적인 악송구로 상대 팀에게 결승점을 헌납했다. 타석에서나 마운드에서나 이래저래 우울할 수밖에 없는 경기였다.

“악송구한 거 너무 신경 쓰지 마”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내가 룸미러로 뒤를 살피면서 말했다.

“신경 안 쓰는데.”

우주의 목소리가 의외로 밝았다.

“엄청 잘 맞았는데.”

5회에 친 타구 얘긴가 보다. 우주가 새로 산 배트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승리를 했지만 우울했던 이전 경기와는 달리 졌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신이 여전히 팀 성적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야구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지는 것 같다, 서비스 로드처럼.

다음 날 피카렐라가 부모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경기 결과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내용이 만족스러웠다면서 아이들을 칭찬했다. 심판들도 이번 가을에 본 경기 중에서 최고의 경기였다고 칭찬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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