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2013년 8월 12일 새벽 나는 뉴욕에서 출발해 도미니카 공화국의 산토도밍고에 도착하는 비행기의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었다. 옆자리에는 윤경환이 있었다. 그는 출발 열흘 전까지 고민하다가 선교 팀에 합류했다. 비행기에는 우리 외에도 여섯 명의 선교 팀 일행이 더 있었다. 목사님, 선교팀장 박인태, 허 집사님과 딸 지현, 이관수 송민경 부부. 우리 여덟 명은 4박 5일 동안 도미니카 공화국에 머무르면서 네 곳의 도시-바라오나, 하키메제스, 메자, 히마니-에 들를 예정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한 후에 움직여도 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자 승객들이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을 때나 지를 법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윤경환에게 물어보니 아마도 무사히 착륙한 것에 대한 감사의 세리모니인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출발할 때부터 두통이 좀 있었고, 약간의 근육통을 동반한 몸살 기운과 명치부위의 통증이 간헐적으로 있었다. 공항에서 나와 은색 미니 밴을 타고 숙소로 이동할 때 차창 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두 가지 파란색으로 분리된, 배 한 척 없는 텅 빈 바다였다. 고즈넉한 풍경 때문이었는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어쩌면 카리브해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에 좀 더 운이 좋으면 수영은 아니더라도 카리브해에 발을 담그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운이 아주 좋으면.
김반석 선교사가 마중을 나왔다. 작고 깡마른 체구에 눈매가 맑고 선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꽤 멀었기 때문에 중간에 주유소에도 들르고, 휴게소에서 점심도 먹고, 길가에서 파는 망고도 몇 개 샀다.
선교기간 동안 우리가 머물 숙소는 마리아 몬테즈 호텔이었는데, 옅은 분홍색을 띤 3층 건물이었다. 나와 윤경환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는 나와 동갑이었고 160센티미터가 조금 넘는 키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을 쓰고 앳돼 보이는, 똘똘이 스머프 같은 외모였지만 날카롭고 총명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다. 합창대회를 같이 준비하면서 느낀 건데 그는 추진력이 있고 일처리가 시원시원했다. 경환은 교회에 나오는 열 명 남짓한 삼사십 대 교인들의 구심점이었고 실질적인 리더였다. 우리 가족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던 초기에 윤경환은 사업 때문에 미국과 한국을 오가느라 바빴다. 그래서 교회에서 그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5월 즈음에 완전히 사업을 접었다. 사업이 잘 안 풀린 건 개인으로서는 안 된 일이었지만 그가 자주 나오면서 교회는 활력을 띄었다.
호텔 방은 넓지는 않았지만 둘이 지내기에는 충분했다. 두 개의 침대와 선풍기 하나, 벽에는 작은 액자 두개와 20인치 모니터 정도 되는 큰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세 액자 속에 모두 차창 밖으로 봤던, 바다와 야자수가 그려진 풍경이 있었다. 벽지는 누렇게 바랜 곳과 얼룩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비교적 깨끗했다. 무엇보다 온수가 잘 나오고 에어컨이 조금 덜덜거리긴 했지만 시원했다. 목사님이 우리 방에 들러 1.5리터 생수 두 병을 건넸다. 예전에 로비에 비치된 정수기 물을 마시고 심하게 배앓이를 한 교인이 있었다면서 호텔 정수기의 물을 마시지 말라고 했다.
“왜 오는 걸로 마음을 바꿨어요?”
내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경환에게 물었다.
“제가 원래 목사님 말씀 잘 듣거든요.”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목사님이었던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에 왔다. 도미니카에서 같은 방을 쓰는 동안 그가 자신이 학교 다닐 때 이야기를 해줬다. 요즘에는 그런 차별이 많이 사라졌지만 경환이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한국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 왕따를 당하는 것보다 더 서글펐던 건 자신의 한심한 영어 실력이었다고. 왕따를 시킨 놈들에게 ‘찰지게’ 욕을 퍼부어 줘야겠는데 간절한 마음과는 달리 구사할 수 있는 영어가 고작 ‘아 유 크래이지?’였어요. 지들끼리 피식피식하며 낄낄거리더라구요.
“집사님은 왜 오셨어요?”
그가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나 역시도 그만큼이나 망설였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시원한 답을 해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사실 나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몰랐으니까. 솔직하게 말하면 선교를 떠나기 직전까지도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선교지에 도착한 후에 한동안 여기저기가 아팠던 것도 왠지 모를 불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생면부지의 도미니카 사람들을 진료하면서, 그리고 그들과 저녁마다 예배를 보면서 내 불안과 아픈 증상들은 서서히 사라졌다.
둘째 날 저녁에 있었던 하키메제스 교회의 예배에서 김반석 선교사가 선교팀을 이글레시아스 에반젤리카 도미니카나의 성도들에게 소개했다. 이어서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고, 선교팀의 찬양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와 이관수의 간증이 있었다. 김반석은 설교와 간증을 스페인어로 통역했다.
그날 낮에 버스 안에서 이관수가 자신이 크리스찬이 된 이야기를 들려 줬는데 그것이 그날 도미니카 교인들에게 들려 준 간증의 내용이었다. 예전에 새그하버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그 간증이었다.
이관수는 원래 불교 신자였다. 송민경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신부 집의 반대가 심했다. 결혼식이 육 개월 정도 남았을 무렵, 송민경은 신혼여행 대신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가자고 제안했다. 이관수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성지순례가 신부집에서 결혼을 허락하는 조건이었으므로 군소리 없이 신부를 따라가기로 했다.
나사렛에서 시작해서 가나를 거쳐 둘째 날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도시인 가버나움에 도착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닷가를 따라 삼백 미터 정도 동서로 뻗어있는 성읍이었다. 가이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님이 행한 기적에 대해서 얘기했다. 갈릴리 호수의 북쪽 해변에 있는 이 곳에서 열병을 앓는 베드로의 장모가 회복되고, 중풍환자가 일어나고,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깨어났다.
이관수는 믿기지도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성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들로부터 빠져나와서 갈릴리 호숫가를 걸었다. 걷고 있던 중에 큰 바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방문 크기의 검은 현무암 바위였다. 그는 성경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몇 천 년 전에 예수님이 그 바위 위에 서 계셨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씀을 전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았다는 이야기가 두서없이 떠올랐다. 이관수는 홀린 듯이 바위에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갖다 댔다. 손이 닿자마자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참을 그곳에서 서 있다가 일행으로 돌아왔을 때, 송민경에게 가버나움과 갈릴리 호수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다시 듣게 됐다. 그는 그 때 자신이 성지순례를 오게 된,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왜 그렇게 울었는지, 참.”
“그때만 울었나, 간증하면서도 펑펑 울었잖아요.”
“아아, 왜 그랬을까요. 쪽팔리게.”
이관수가 멋쩍은 듯 턱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렀다.
“신앙은 의지가 아니라 은혜라니까요.” 목사님이 말했다.
그날 저녁에 숙소로 돌아와서 2층 테라스의 원탁에 모였다. 다음 날 공연할 인형극 ‘돌아온 탕자’ 때문이었다. 일단 장비들을 챙겨오긴 했지만 출발 전까지도 인형극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지 못했다. 목사님은 교인들이 선교를 위해서 모아준 돈으로 산 인형들이었기 때문에 (인형이 여섯 개였는데 개당 백 달러가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웬만하면 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문제는 선교팀이 너무 늦게 만들어져서 연습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 스페인어로 녹음된 음향을 틀고 거기에 인형동작을 맞춰야 하는데, 이관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전혀 스페인어를 몰랐다. 자기 인형의 대사에서 움직여야 하는데 자꾸 틀렸다.
연습을 보던 박인태는 어설프게 하느니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관수는 우리가 보기에는 좀 어설퍼 보여도 이곳에서 매번 반응이 좋았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완성도가 너무 심각한 수준인 게 문제였다. 삼십 분 정도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관수가 아이디어를 냈다.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알아듣는 이관수가 인형 조종자들과 함께 상자 속에 같이 들어가서 대사에 해당하는 인형 조종자를 손으로 건드려서 신호를 주기로 했다. 인형 조종자는 몇 개 동작을 외워서 순서에 맞춰서 하면 되는 것이다. 두세 번 맞춰보니 금세 자기 역할에 익숙해졌다.
인형극 연습이 끝나고 망고를 먹을 때 김반석이 조금 머뭇거리면서 자신에게 무좀이 있는데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를 물었다.
“그냥 연고를 바르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저희가 올 때 가져왔으면 좋았을 텐데. 돌아가면 부쳐드릴게요.”
“아닙니다. 심각한 병도 아닌데 좀 참으면 되죠. 여기 사람들도 다 그러면서 지내는데요.”
그가 선교에 관한 웃픈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한국의 모 교회에서 아프리카로 선교사를 파견했다. 선교사가 그 마을에 도착해서 보니 땅에 자갈도 많고 날카로운 가시 같은 것이 많아서 발을 다칠 일이 많은데 원주민들이 아무도 신발을 신지 않고 있는 것이 마음이 쓰였다. 한국의 교회로 돌아와 선교 보고를 하면서 선교지의 원주민들이 신발이 없으니 신발이 필요하다고 했다. 교회에서 백 켤레의 신발을 보냈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원주민들의 일부가 신발을 받지 못한 것이다. 상황이 이전보다 나빠졌다. 왜냐하면 신발을 받지 못한 이들은 신발을 주지 않은 선교사에게 불만이 생겼고, 신발을 받은 이들을 시기했기 때문이다. 다음 해에 선교사는 한국의 교회에 모자란 신발을 지원해 줄 것을 다시 요청했다. 한국의 교회에서 다시 신발을 보냈다. 하지만 일 년 사이에 어떤 이들은 몰래 두 켤레 이상을 가졌고, 어떤 이들의 신발은 해졌고, 어떤 이들은 신발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원받은 신발은 다시 모자랐다. 원주민들의 불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 이런 요청이 반복되니까 한국의 교회에서는 선교사가 복음을 전할 생각은 안 하고 신발만 사달라고 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결국 지원은 끊겼고 선교는 실패했다.
“동정심으로 물건을 나눠주는 것만으로 선교가 끝나선 안돼요.”
나는 공항에서 마리아 몬테즈 호텔까지 오는 동안 보았던 가난한 농촌의 풍경과 예배를 드리고 진료하면서 보았던 남루한 행색의 도미니카 사람들을 떠올렸다.
“도미니카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지수가 높다는 거 아세요? 여기 사람들은 돈도 없고 물건도 부족하지만 그것 때문에 불행하지는 않아요. 선교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신발을 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발을 벗는 일이었어요. 그들처럼 살아야지 그들을 겨우 이해할 수 있어요.”
다음날 ‘돌아온 탕자’ 인형극은 대성공. 관람평을 따로 들은 건 아니었지만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는 부분에서 야유가 들리고 돌아와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했다. 이관수의 말이 맞았다. 좋은 정도가 아니라 가히 열광적이었다.
선교 기간 동안 히마니를 제외하고 세 곳의 마을에서 진료를 했다. 특별한 장비가 없는 장소에서 의사가 할 수 있는 진료 행위라는 게 ‘말’이 전부인데 말이 안 통하니 그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나마 영어가 통한다면 어떻게든 ‘말’의 진료를 시도해보겠지만 여기는 스페인어만이 가능한 도미니카의 시골 마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 개의 도시에서 사흘 동안 105명의 환자를 보았다. 메자에서는 50명의 환자를 보았다. 한국에서 빡빡하게 본 오전 외래 환자 숫자와 비슷했다. 김반석 선교사가 하루 통역을 해줬고, 나머지 이틀은 자원봉사 나온 청년 두 명(임마누엘과 로베르토)이 나의 짧은 영어를 스페인어로 통역해 주었다.
수족구가 의심되는 아이와 신우신염이 의심되는 환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경미한 환자들이었다. 두통, 복통, 요통, 가벼운 감기 증상. 가끔 증상이 전혀 없는데도 단지 의사를 만나기 위해서 온 환자들도 않게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가장 많이 처방한 약은 ‘애드빌’이었다. 여기선 애드빌이 육체적인 통증뿐만 아니라 아프고 불안한 마음도 치료해주는 것 같았다.
셋째 날 메자에서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우리는 메자의 교인들과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경환은 음향시설과 교회 내부에 설치할 스크린 천을 점검했다. 청년부 회장인 로날도가 다른 청년들과 함께 경환을 도왔다. 로날도가 오면서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청년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보이기 시작했다. 김반석에게 로날도에 대해서 물었다. 로날도는 시내에 위치한 핸드폰 대리점에서 일하기 때문에 일을 마치고 오느라 늦게 온 것라고 했다. 도미니카는 일자리가 별로 없기 때문에 핸드폰 대리점은 삼성이나 엘지 정도의 직장이에요. 로날도는 도심의 대기업 사무실로 출근하는 엘리트 청년인 것이다.
방문 서너 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하얀 천으로 만든 스크린을 교회 안에 설치했다. 영화가 시작될 때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은 후덥지근한 교회 안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님의 초췌한 옆모습이 크게 한 번 출렁거렸다.
유다는 은화 삼십 냥에 예수님을 바리새인에게 넘긴다. 바리새인의 수장 가야바는 신성모독을 이유로 예수님을 체포해 빌라도에게 넘기지만 빌라도는 헤롯에게, 헤롯은 다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떠넘긴다.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란을 두려워했던 빌라도는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선언하며 십자가형을 허락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다시 교회 안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스크린이 또 한 번 출렁거렸다.
“처음 본 거예요?”
숙소로 돌아왔을 때 경환이 물었다.
“제목은 많이 들었는데 본 건 처음이에요.”
“어땠어요?”
“좋던데요.”
“어떤 점이요?”
“교회를 어렸을 때부터 다녔는데 예수님이 감당하신 고난이 어떤 것이었는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거든요.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그 고난이 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아요.”
경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라엘에서는 앰뷸런스에 십자가 대신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어요. 십자가가 너무 끔찍한 상징이라서 그런 거래요.”
“그래요?”
“예수님은 왜 그런 고난을 선택했을까요?” 내가 물었다.
왜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 되는 영광을 거부하고 채찍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손목과 발목에 대못이 박히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말라 죽어가는 죄인의 길을 택하셨을까.
“드디어 회개가 시작됐네요.”
경환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저는 마리아가 빌라도의 부인에게 받은 하얀 수건으로 바닥에 묻은 예수님의 피를 닦는 장면이 이해가 안 돼요. 왜 바닥에 묻어 있는 피를 그렇게 열심히 닦는 걸까요?” 경환이 물었다.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기 위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부모로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아닐까요. 병원에서도 종종 보는데, 환자는 의식 없이 누워있고 어머니가 면회 와서 손이나 다리를 주무르면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경우가 있거든요.”
경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님이 고르신 거예요?”
“아니요. 목사님이요.”
문득 경환이 자신의 아버지가 목사님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되도록 목사님 의견에 따르는 편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저희 아버지가 어떻게 목사님 됐는지 얘기 안 했나요?”
“들은 적 없는데요.”
경환이 선풍기를 껐다.
“할아버지가 장로님이었어요. 대학을 지원할 즈음에 할아버지가 아버질 부르셨어요. 언젠가 아들 한 명을 반드시 신학대학에 보내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하셨다면서 선택된 아들이 바로 아버지라고 했어요. 싫다고 하셨죠. 할아버지는 대학은 졸업한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어요.
졸업을 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신학대학이 싫었어요. 하지만 집에 있으면 할아버지가 계속 얘기하실 게 뻔했죠. 대책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대학원을 가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아쉬워했지만 기다리겠다고 했죠. 그리고 또 2년 정도가 지났어요. 아버지는 여전히 신학대학이 싫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맘에도 없는 대학원을 계속 다닐 수도 없었죠.”
경환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장기적인 핑계가 필요한 시점이네요.” 내가 말했다.
“사법고시가 딱이었죠. 완전 핑계는 아니었어요. 큰 할아버지 댁에서 공부하겠노라고 선언을 했어요. 큰 할아버지 댁은 시외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또 버스를 타고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로 삼십 분 정도 들어가야 하는 시골이었죠. 그 마을 입구에 붉은 벽돌로 지은 조그만 교회가 있었는데, 큰 할아버지 댁이 바로 그 옆이었죠. 큰 할아버지가 밥값은 해야 한다면서 아버지에게 일을 하나 줬어요. 당시에 댁 앞에 커다란 교회 종이 있었는데, 전쟁 통에 공이가 망가지면서 누군가 때마다 종을 쳐줘야 했어요. 빈 산소통을 구해서 종 옆에 뒀는데, 그걸로 종을 쳤죠. 처음에는 그냥 했는데 한 달쯤 지나니까 교회고 산소통이고 모두 꼴도 보기 싫었어요. 아버지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죠. 고시 합격.”
“합격하셨어요?”
“그럴 리가요. 목사님이라니까요. 어느 날 아침에 교회 종이 울리지 않았어요. 이를 이상히 여긴 마을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큰 할아버지 댁에 들렀어요. 도착해보니 아버지가 의식을 잃은 채 방에 쓰러져 있었어요. 연탄가스 중독이었죠. 부랴부랴 병원으로 옮겼죠. 아버지가 병실에서 정신을 차린 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다가 화들짝 놀랐대요. 왜 그랬을까요?”
경환이 말을 멈추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가브리엘이라도 만나셨나?”
“뭔가를 본 건 맞아요.”
“그럼 베드로?”
경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방에 있을 수 있는 건 보호자밖에 없는데, 그것 때문에 놀라셨을 것 같지는 않고.”
“사람이 아닐 수도 있죠.”
“모르겠는데요.”
“산소통이요. 그렇게 미워했는데, 결국 가장 미워하는 걸로 아버질 살리셨죠. 산소통 때문에 신학대학을 가게 된 거래요. 좀 웃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