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봉승

by 생각의 변화

완봉승


플레이오프 2차전 상대는 코맥노스골드. 브라킷 결정전에서 우리 팀에게 뼈아픈 역전패를 안겨줬던 팀이다. 한 번 밖에 경기를 한 적은 없지만 내 생각엔 우리 팀이 모든 면에서 한 수 위였다. 하지만 저번 경기에서 보았듯이 아무리 전력상 우위여도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함부로 속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1회에 우리 팀 타선은 상대편 투수를 효과적으로 공략해서 4점을 뽑았고, 2회에 한 점을 추가했다. 우리 팀의 선발 투수는 로건이었고, 로건은 4회까지 한 점도 주지 않았다. 5:0. 로건은 이전 경기보다 구위, 제구가 모두 좋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8연승 중인 팀이 2이닝을 남겨두고 ‘무려’ 5점이나 앞서고 있으니 안심이 되는 것이 당연했지만 오히려 (이전 경기에서는 9점이나 앞서고 있었는데) ‘고작’ 5점밖에 앞서고 있지 않으니 불안하기만 했다.

5회 초 우리 팀은 우주의 2루타와 프리다의 적시타로 2점을 더 보탰다. 7:0. 로건은 5회 투아웃까지 잡고 에이든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에이든은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 이제 남은 건 한 이닝. 결승전이 바로 코앞이었다.

6회 말 에이든은 두 번째 아웃 카운트까지 쉽게 잡았다. 경기는 이렇게 그냥 쉽게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다음 타자 볼넷, 그리고 그 다음 타자 역시 볼넷. 에이든은 마운드 위에서 뭔가 마음대로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리의 표정을 살폈다. 아직 초조함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타자도 또 볼넷. 주자 만루. 불길한 데자뷔의 기운이 스멀스멀 퍼지는 게 느껴졌다.

개리가 타임아웃을 요청하고 마운드로 올라갔다. 일단 흐름을 끊어보자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달리 뭐가 있으랴. 감독이 덕아웃으로 돌아간 뒤 에이든은 마운드 위에서 모래를 발로 고르며 크게 두 번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에이든이 던진 공은 타자 앞에서 크게 바운드 되며 뒤로 빠졌다. 그 사이 3루 주자는 홈인. 7:1.

개리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투수 교체 외에 감독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지만 뒤에 대기하고 있는 투수들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투수교체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개리는 그라운드 안을 뚫어져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투 아웃, 주자는 1, 2루. 다음 타자를 상대로 초구는 볼. 두 번째 공을 상대 타자가 받아쳤고 3루수 코너 쪽으로 강하게 날아갔다. 공은 코너의 오른쪽 정강이를 맞고 코너 바로 앞에 떨어졌다. 코너는 다리의 통증 때문에 금방 공을 잡지 못했다.

개리와 코치들이 일제히 “3루!”를 외쳤다. 코너는 잠깐 동안 무슨 상황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지만 공을 잡고 절뚝거리면서 3루 베이스를 밟았다. 쓰리 아웃. 경기 끝. 코너는 공에 맞은 부위가 아픈지 찡그리면서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다. 개리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3루 쪽으로 달려가 코너의 상태를 확인한 후에 코너를 업고 그라운드 밖으로 나왔다. 코너의 다리는 공에 맞은 부위가 조금 벌겋게 되긴 했지만 괜찮은 것 같았다. 7:1. 저번에 당했던 역전패에 대한 완벽한 설욕전이었다. ‘그날’ 이후로 개리가가장 환하게 웃은 날이었다.

IMG_0015.JPG 플레이오프 2차전

여름리그를 거치면서 우리 가족들과 새롭게 친해진 사람은 마크의 엄마 로렌이었다. 마크는 우주와 같은 시그널 힐 초등학교에 다녔고,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학년이 같았다. 로렌은 봄 리그 동안에 마크와 우주가 같은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기뻐했다. 사실 우주의 원래 학년은 5학년이어야 하지만 우주가 겪게 될 (언어를 포함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고려해서 한 학년을 낮춰 입학시켰다. 누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마크는? 마크는 약간의 신체적인 장애가 있었다.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었다. 아주 심한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주루 플레이나 수비에 문제가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걸을 때 보면 오른쪽 다리가 안쪽으로 눈에 띄게 돌아가 있었다. 마크는 아마도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학년이 하나 늦은 것 같았다.

마크는 위로 나이 차이가 꽤 있어 보이는 형이 세 명이 있었고, 봄 리그 동안에는 주로 형들이 마크를 야구장에 데려다주었다. 자주 마크를 야구장으로 데리고 왔던 막내 형과도 적어도 6살 이상 차이가 날 것 같았다. 여름리그가 시작되면서 마크는 주로 엄마인 로렌과 왔다. 가끔 주말 경기에는 마크의 아빠도 왔는데, 오십대 중반 이상으로 보였고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콧수염을 기른 분이었다.

마크의 아빠는 항상 신문이나 잡지를 가져와서 응원석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그걸 경기 내내 읽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야구 경기를 전혀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들이 넷이니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야구 경기를 봤을까,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어느 날인가 우주가 선발투수로 나와서 잘 던지고 타석에서는 펜스 앞까지 굴러가는 2루타를 쳤던 날에, 평소에는 말이 없던 그가 “오늘은 우주가 잘 던지고 잘 쳤네요.”라는 말을 인사말처럼 내게 건넸다. 그 후로 난 그가 가끔은 경기를 본다고 믿었다. 마크도 경기장에서 매일 신문만 보는 것 같은 아빠가 사실은 자신의 경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브론즈 브라킷 결승전이 있던 날 아침, 여느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우주와 나는 선컴파크에서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빠는 요즘 어때?” 우주가 110번 도로변에 있는 베스킨 라빈스에서 산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뜬금없이 물었다.

“뭐가?”

“맨날 집에만 있잖아. 친구 만나고 싶지 않아?”

“어차피 한국 가면 만나게 될 텐데.”

“나도 친구들이 보고 싶긴 한데 요즘도 재밌어”

“아빠!” 차가 멈추자 우주가 뒷좌석에서 날 불렀다.

“왜?”

“이렇게 아빠랑 둘이서만 있을 때 얘기하니까 이상하다”

“뭐가?”

“한국에 있을 때는 아빠랑 있으면 이상하게 어색하더라. 별로 할 얘기도 없고.”

“요즘엔?”

“지금도 좀 어색하긴 한데 그래도 한국에 있을 때보다는 나아. 한국에서 아빠랑 둘이 있으면 얼마나 어색했는데.”

한국에서 나는 늘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다. 우주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무뚝뚝한 태도, 짜증 섞인 말투, 피곤한 얼굴, 무관심한 표정. 우주가 보기에 아빠는 왠지 말을 걸기 어려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피곤하다는 건 핑계였고 그것 보다 근본적인 건 나의 감정이었다. 우주가 어색하다고 느꼈던 진짜 이유는 내가 우주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표정은 내 마음이었고, 아마도 그 마음이 ‘어색하다’라는 불분명한 느낌으로 우주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태너 파크에 조금 일찍 도착했다. 오전에 비가 내리긴 했지만 경기를 하는 데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우주와 나는 보슬비를 맞으며 스무 개 정도의 연습 투구를 했다. 공을 받아 보니 오전에 선컴 파크에서 연습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스피드와 제구가 모두 좋았다. 이런 공을 열 살 아이들이 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만큼 그날 받았던 우주의 공은 미국에 와서 야구를 시작한 이래로 가장 좋은 공이었다. 하지만 연습 투구 때 던지는 것만 보고 실전을 예측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불펜 선동렬이 얼마나 많은가.

결승 상대는 바빌론사우스그레이(Babylon south gray). 상대 팀은 14위로 시작해서 결승전에 올라 왔고 우리 팀은 18위로 시작해서 파죽의 9연승을 내달리며 결승에 올라왔다. 참고로 어제 우리가 꺾은 팀은 11위 팀이었다.


IMG_2517.JPG 결승전 투구 연속동작


1회 초 우리 팀은 선발타자 로건으로부터 시작한 공격에서 집중력을 발휘하며 5점을 뽑았다. 1회 말 우주는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내주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1, 2루 간을 뚫는 깨끗한 안타였다. 하지만 후속타자들을 삼진과 범타로 처리하며 실점 없이 마쳤다. 5:0. 이어지는 이닝에서 우리 팀은 매 이닝 점수를 뽑았다.

4회 초 두 타석에서 모두 루킹 삼진을 당한 우주가 안타를 쳤다. 3루수 키를 넘기는 장타 코스였는데 1루를 돌다가 넘어지면서 단타에 그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단타냐 장타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돼버렸다. 다음 타석은 4번 타자 프리다. 볼, 볼. 투 볼. 세 번째 공에 프리다가 배트를 휘둘렀다. 프리다가 친 공은 센터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중앙 펜스를 넘기는 투런 홈런이었다. 그날 우리 팀이 만들어 낸 최고의 장면 중 하나였다. 프리다의 공이 펜스를 넘어가는 순간 상대 팀 투수와 코치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16:0.

4회 말 우주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우주는 세 타자를 삼진과 땅볼로 가볍게 처리했다. 16:0. 콜드게임 승. 우리는 여름리그 브론즈 브라킷에서 우승했다. 4회에 나온 프리다의 투런 홈런도 멋졌지만 오늘 경기 최고의 장면은 우주의 완벽한 투구였다. 우주는 1회 첫 타자에게 안타를 맞은 후 모든 타자를 삼진과 범타 처리했다. 이른바 무사사구 완봉승. 첫 타자에게 맞은 안타만 아니었으면 퍼펙트게임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상대 팀은 14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아예 타석에 서보지도 못했다. 경기 전에 우주의 공을 받아 본 내 느낌이 잘못된 건 아니었던 것이다. 로렌이 우주가 잘 던졌다고 칭찬하면서 자신이 찍은 우주의 연속투구를 이메일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 사진은 지금까지 우주가 야구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중에서 최고의 사진이다.

리그전 전승으로 올라 온 우리 팀은 플레이오프에서도 38점을 얻는 동안 단 1점만을 내주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이 압도적인 경기력에서 우주의 위력적인 투구도 크게 한몫 했다. 우주는 플레이오프 두 경기에서 8과 2/3이닝 동안 단 한 점도 내 주지 않았다.

진짜 야구에 소질이 있는 걸까. 우주는 언젠가부터 가끔씩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결승전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우주가 야구 선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IMG_2516.JPG 브론즈 브라킷 우승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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